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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양빈 그리고 신의주 특구 비밀을 쓰게 된 이유

[머리말]
양빈 그리고 신의주 특구 비밀을 쓰게 된 이유
2002년 초,나는 베이징의 한 출판사로부터 원고청탁을 받고 ‘대부전하 중국대륙 부자 100명’이란 책을 쓰게 되였다.왜냐 하면 나는 한떄 ‘재부(財富’잡지가 편집인으로 일한 덕에 꽤 많은 민영기업가들을 알고 있었다.말하자면 제1대의 모우치중(牟其中),뤄중푸(羅忠福),장웨이(姜偉),우빙신(偉炳新),리샤오화(李暁華),류융하오(劉永好),류융싱(劉永行)형제,한웨이(韓偉),인밍산(尹明善)및 나중에 궐기한 일부의 민영기업가들을 알고 있었다.내가 부자들을 직접 취재하였고 그들과 괜찮은 교분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관련자료와 사진까지 확보하고 있는 까닭에 출판사는 오로지 나만이 가장 빠른 시일 내에 이에 관한 책을 잘 집필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실로 나는 10여 년 간 중국 부자들의 고된 창업 및 흥망성쇠에 관한 대량의 소재를 확보하고 있었다.그런 이유로 일찍이 그들 개개인에 대한 전기(傳記)를 써서‘부란 백성들의 손에 쥐어 있다’는 이념을 강조함과 아울러 중국의 민영기업가들을 위한 홍보작업을 추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마침 출판사의 청탁이 있어 나는 이를 쾌히 승낙하고 단 2개월이란 짧은 시간 내에 상,하 2권으로 50여 만 자나 되는 졸작을 탈고하였다.엄격한 의미에서 말한다면 이는 단지 중국 부호들에 대한 자료성격에 불과한 책일 뿐이였다!
하지만 2001년 미국 ‘포브즈’지에 발표된 중국대륙 100명 부자의 리포트에 내가 모르는 민영기업가들도 적지 않았다.그들은 다크호스처럼 돌풍을 일으키며 내달렸고 부호 랭킹에 오르게 된데 대하여 나는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더욱이 부호 랭킹에 앞장선 앞의 10여 명 즉 양빈(楊斌),양룽(仰融),쉬룽마오(許榮茂),천리화(陳麗華) 등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떄 베이징 신화사 화보 편집실의 친구 다이지밍(戴記明)이 이방면의 화보집출간을 기획하고 있는 중이여서 나더러 그가 출간할 화보에 들어갈 글을 맡아줄 것을 요청해왔다.
그리하여 나는 끝내 두 가지 명분을 갖고 내가 아직 잘 알지 못하는 몇몇 민영기업가들에게 편지를 보냈다.나는 그들에게 보내는 편지용지에까지도 신경을 썼다.나는 작은 서예처 붓글씨로 영보재(榮寶齋,서울 인사동 거리의 가게와 비슷한 베이징의 서예,골동품거리의 유명한 가게)편지지에 정성들여 편지를 썼다.
그러나 이 ‘대부천하’원고를 교부할 기일이 다가오건만 유독 양빈 측에서는 아무런 답장도 없어 나는 조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왜냐하면 이 ‘중국부자 100명’이란 책이 만약 랭킹 제2위인 양빈이 누락된다면,다시 말해서‘포브스’가 처음 추천한 한 필의 다크호스가 빠진다면,필히 이 책의 권위에 영향을 미칠 것이기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나와 교분이 있는 랴오닝성 및 랴오닝성 농업청의 친구들을 통해 직접 양빈과 연락을 취하고자 하였다.나는 랴오닝성 친구들이 도와준 덕분에 2002년 3월5일 비로소 선양으로 가게 되였고,이튿날 네덜란드촌(荷蘭村) 유라시아그룹(歐亞集團)총부에서 양빈을 만나게 되였다.
나는 이 같은 일련의 과정에 대하여 ‘부호천하 포브스, 중국대륙 100명 부자 리포트’란 책에 아래와 같이 자세히 밝혔다.



나의 첫 인상
나는 오랫동안 재경잡지사 편집인으로 있으면서도 여태껏 양빈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그런데 미국 ‘포브스’지가 2001년도 중국대륙 100명 부자의 리포트를 공급한 것을 보고서야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알게 되였고 소문도 없던 그 ‘부자 다크호스’가 단번에 부호 랭킹 제2위에 올라서게 된 것을 알았다.따라서 그의 재산은 랭킹 제1위인 류융하오(劉永好) 형제의 10억달러보다 1억 달러가 적은 9억 달러라는 것도 알게 되였다.‘포브스’는 류씨 4형제의 재산을 집계해서 랭킹 제1위로 선정한 것인데다가,이 류씨 4형제는 이미 재산을 나눈 상황이어서 양빈은 자연히 한층 더 돋보이게 되였다.
양빈은 어떤 사람일가?양빈에 대해 비단 나뿐만 아니라 베이징의 많은 재정경제전문지의 편집인들 그리고 경륜 있는 기자들마저 모두 모르고 있는 상황이었다.그들은 ‘포브스’에서 발표한 중국에 대표적인 부자 리포트를 통해 양빈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것이었다.왜냐하면 양빈이 줄곧 매스컴과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왔기 때문에 양빈의 경력에 대해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이러한 점이 오히려 양빈이란 인물의 신비한 색채를 짙게 했을 뿐만아니라 사람들의 호기심을 이끌기에 충분했다.
내가 선양에 도착하는 당일 저녁 주인은 나의 숙소를 그의 별장으로 정했다.여기에는 이미 54동의 우아하고 괘적한 유럽 양식의 특이한 별장으로 구성되어 있어 참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게다가 매 동마다 150m의 긴 유리온실이 갖춰져 있었고 거기에는 거주자의 취향에 따라 자신이 즐기는 갖가지 꽃과 채소를 가꿀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주인은 나에게 금년과 내년에 119동에 달하는 향촌별장을 질 계획이라고 알려주었다.
내가 투숙한 곳은 2층으로 된 자그마한 네덜란드식 별장이었는데 1층에는 넓은 객실이 있고 마사지를 겸한 실내 큰 목욕실,식당,주방,창고와 주차장이 갖춰져 있었으며,2층에는 화장실이 있는 방이 4개나 있었다.나의 안내를 책임진 유라시아그룹 접대실장 저우샹(周翔)은 직원들더러 네덜란드 온실에서 생산한 각종세계 명화를 손님방에 갖다 놓도록 특별히 당부하였다.손님들에게 쾌적한 환경을 마련해주었고 편안함과 즐거움을 갖게 해주었다.
저우샹은 네덜란드의 농민들은 집집마다 이런 자그마한 별장식의 건축물을 갖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이런 집을 두 채나 갖고 네덜란드에 화훼,채소,젖소를 경영하는 농민들의 인구당 연수입이 2만5천 달러를 훨씬 능가한다고 알려주었다.
유럽에 가보지 못한 나로서는 여기에서 네덜란드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삶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 날,랴오닝성 농업청의 레이수더(雷樹德)부청장이 나를 안내하여 유라시아그룹 총부 사무실에서 양빈을 만나게 하였다.이 빌딩은 양식이나 규모 전체를 포함해 모두 네덜란드 여왕의 왕궁 그대로 본따서 지은 건물이었다.이는 전형적인 네덜란드 건물로서 총 4층인데 양빈의 사무실은 3층에 있었다.
사실 양빈을 취재하기는 대단히 어려웠다.왜냐하면 그는 실속있게 사업하는 데만 열중하였고 기자들을 만나기 싫어했으며 심지어 거의 거절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나중에 그는 자신의 이러한 처신에 대해 웃으면서 중국의 속담 한 마디를 코믹하게 썼다.‘사람은 이름나는 게 두렵고,돼지는 살찌는 게 두렵다’라고 하면서 그는 이어“포브스에서 나의 이름을 중국 부자 리포트에 올리자 매스컴의 전화와 편지는 줄을 잇다시피 했어요.그런데 나는 사업가입니다.나는 그저 실속 있게 사업하고 싶을 따름입니다.그래서 기자들을 만날 시간이 정말로 없습니다.나는 그들이 나의 심정을 얼마간이라도 알아주길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양빈은 매 달마다 세계 각지에 분포된 자신의 지사들에 가서 사업보고를 받아야만 했고,때마침 네덜란드촌의 건설이 한창 공사중인 데다가 외국의 유명한 대기업가들이 그를 찾아와 합작의향 상담을 하는 등 일로 해서 그는 그야말로 시간을 쪼개 써도 모자란다고 할 형편이었다.
이런 상황이어서 기획,홍보를 담당한 부사장 볜서우제는 거의 전부를 자신이 맡고 있다고 나에게 말했다.그러면서 찾아오는 기자들의 취재에 일일이 임하지 못할 경우,그들은 네덜란드촌의 별장 구경으로 안내하는 수밖에 없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고 말했다.그는 웃으면서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였다.선생님은 랴오닝성 농업청 레이수더 부청장이 직접 양회장님께 연락한 까닭에 ,선생님이 베이징에서 선양으로 온 그날 저녁에야 이 일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나는 그저 볜씨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레이수더도 웃으며 말하였다.
“나는 양빈이 너무 다망해서 기자들의 취재를 잘 승낙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그래서 하는 수없이 내가 이 형님을 직접 모시고 그를 보러 온 것이죠.”
볜서우제 역시 맞장구를 쳤다.
“레이 청장님도 우리 여기에 안 오신지 꽤 오래되신 것 같습니다.마침 양회장님께서도 당신을 뵙고 싶어하던 차라,함꼐 이야기를 나누시죠!”
양빈은 방문 온 단둥시 책임자들을 보내고 나서 우리들을 만나러 왔다.그는 우리를 보자마자 악수를 하면서 시원하게 말하였다.
“레이 청장님은 우리 여기에 안 오신지 꽤 오래 되지요.당신도 우리 네덜란드촌을 좀 신경 써 주셔야죠!”
레이수더는 변명하듯 대답했다.
“실은 굉장히 바빠요.랴오닝의 농업을 맡은 게 만만치 않습니다.너무 바빠서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예요.내일은 또 전 성의 봄계절 농사회의를 하러 하이청(海城)으로 가야 하오.”
그는 나를 가리키면서 양빈 앞에서 나의 위상을 치켜세웠다.
“헌데 아무리 바빠도,베이징에서 오신 이 형님을 내가 안 모시면 예의가 안 되죠!”
양빈은 중등 키에 기골이 장대하고 몸집이 튼튼했다.그는 흰 셔츠에 평상복 차림이었는데 꾸밈없는 자연스러움과 친밀감을 주었다.그는 두툼한 손을 내밀며 나와 악수를 청하면서 소탈하게 말했다.“제가 양빈입니다.환영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준 첫 인상은 소박하고 정열적이며 자연스러웠다.그리하여 나를 마치 옛적부터 극진한 친구를 대해주듯 하였다.그는 우리들더러 긴 소파에 앉게 하고 자신은 곁의 작은 소파에 앉았다.그의 첫 번째 일이란 ‘스리파이브’표 담배를 꺼내어 손님들에게 권하는 일이었다.어쩌면 이는 그의 버릇일 수도 있다.그리고 나서 그는 자신도 한 대 피우면서 자신을 비웃듯 말했다.“자나 깨나 담배예요!”
나도 웃으면서 그에게 맞장구를 쳤다.“나도 그렇소.하지만 난 중국 담배의 납세자죠.”
이처럼 첫 대면에 우리는 마치 허물없이 지내는 옛 친구를 만난듯,우리들의 대화도 담배연기 못지않게 모락모락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때 레이수더는 카메라맨이 되어버렸다.그는 자리를 바꿔가며 촬영하기에 다망했다.소문에 의하면 그는 촬영기술이 괜찮은 편이라고 한다.
나는 랴오닝성 농업청 부청장 레이수더의 배석하에 양빈의 넓은 사무실에서 그와 문답식의 인터뷰를 가졌고 녹음까지 하였다.오찬은 양빈의 안내로 그가 식사하고 휴식하는 4층에서 하였다.우리는 식사하는 한편 이야기를 나눴다.오후에 레이수더는 농업청에서 주최하는 회의에 참석해야 하므로 자리를 떴다.나는 양빈과 함께 오찬 후 역시 그의 사무실에서 궁금한 점들에 대해 약 1시간 가량 질문을 했다.이로써 나는 금번 선양행의 양빈 취재 임무를 기본적으로 완성한 셈이었다.
저녁에 그는 네덜란드촌 ‘백조의 호수’곁에 열대풍경을 이룬,유리벽으로 둘러싸인 큰 객실에서 미국손님을 맞이하였다.그는 MGM아시아 총재 일행이었다.그들이 네덜란드촌에 온 목적은 관광사업 합작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현지 답사였다.그날 저녁의 만찬에서 나는 양빈이 네덜란드에서 유학할때 친구 마닝(馬寧)및 그가 청해온 항구 디자인 전문가 왕뤄(王諾)를 알게 되었다.이 두 사람은 나중에 신의주 특구 회담대표의 구성원이 되었다.
3월7일 아침 6시,양빈은 마닝,왕뤄 및 베이징 수도공항의 기술요원을 거느리고 신의주 현지답사의 길에 올랐다.주로는 그 곳의 비행장과 항구에 대한 현지답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나도 그날 아침 8시 베이징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3일 후,나는 양빈에 관한 1만5천자 분량에 달하는 글을 탈고하여 네덜란드촌으로 우송했다.며칠 후,그들은 심의를 거친 원고를 나에게 되돌려 우송해왔다.그리하여 나는 이 글을 ‘대부천하’책 속에 수록했다.
솔직히 말해 나와 양빈과의 하루 사귐은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오히려 나는 감각적으로 그가 나에게 어느 정도 경계하는 마음이 있을 것을 느꼈다.아마 내가 랴오닝성의 간부를 통해 자기를 취재하는 데 대한 불쾌감에서 왔으리라고 생각했다.
일반적인 경우에 비추어 보면 나와 그의 인연은 특별히 매듭지을 여지마저 없는 일이었다.기껏해야 어느 날 어느 장소에서 서로 만난다면 악수나 하고 한 두 마디 인사말이면 볼 장을 다 본 셈이다.
베이징으로 돌아온 나는 ‘대부천하’의 편찬에 모든 정력을 기울였다
4월14일,나는 끝내 50여 만 자나 되는 원고 및 후기까지 탈고하여 인쇄에 넘길 수 있게 되였다.저녁에 내가 곧 교부될 원고를 흥미진진하게 뒤적거리면서 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선양의 네덜란드촌에서 걸려온 전화였다.양빈의 컬컬한 목소리였다.“관선생님,지금 어디 계십니까?”“베이징에 있습니다.”“관선생님,나는 관선생이 나에 대한 책을 한 권 써주셨으면 하는데,의향이 어떠십니까?”
나보고 그게 대한 책을 써달라고 요청하다니?정말로 뜻밖이였다.줄곧 매스컴과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왔으나 다크호스마냥 돌풍을 일구어 ‘포브스’중국부자 랭킹 제2위로 오른 그가 아닌가!
그의 창업과 궐기는 나로 하여금 경탄을 금지 못하게 하였다.그의 남다른 경력은 사람들의 호기심,나아가서 신비감마저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양빈은 큰 소리로 시원하게 말했다.“당신이 쓴 글을 보았습니다.기자들보다 훨씬 잘 썼습니다.물론 선생이야 저명한 작가이시니까 그렇겠죠.선생의 일체 경비는 다 내가 책임질 테니까,가장 좋기는 서둘러 네덜란드촌으로 왔으면 합니다.”
나는 왜 그리 서두르는지 이유를 물었다.그러자 그는 벅찬 심정으로 나에게 알려주었다.최근 자신이 평양에 갈 일이 있는데 함께 동행하자는 건의였다.북한은 봉폐가 심한 나라로서 일반사람은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는 상황이였다.그런데 양빈과 동행하면 평양도 가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이는 실로 얻기 어려운 행운의 기회였다.게다가 만약 북한 실황을 소개하는 실화를 쓸 수 있다면 그야말로 기대 이상의 수확이 될 것이다.
나는 물론 그의 요청에 쾌히 승낙하였다.그런데 이 승낙이 나와 양빈과 7개월 간 마치 한 사람이 된 듯 밤낮 함께 어울리는 인연을 이루게 했고,게다가 그때까지만 해도 극비로 진행된 신의주 특구담판에 내가 개입하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4월15일,나는 열차를 타고 선양역에 도착하였다.역에는 네덜란드촌 접대실의 직원이 마중 나와 있었다.그날부터 네덜란드촌의 별장에 투숙하기 시작했는데 한 번 눌러 앉은 것이 반년이 넘은 세월이였다
며칠 후,양빈이 각지로부터 초청한 관련 전문가들과 친구들이 네덜란드촌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그때에야 나는 양빈이 바야흐로 북한과 한 건의 큰 프로젝트를 담판하고 있는데 신의주에 관련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였다.
4월22일,나와 일부 구성원들이 신의주를 거쳐 평양에 도착하였다.그날 밤,우리는 양각도빈관(羊角島賓館)에 투숙했다.이는 대동강 가운데 위치한 대외용 호텔이었다.
나중에 나는 양빈과 함꼐 여러 차례 이 호텔에서 지냈다.
4월23일,양빈은 전용비행기를 타고 평양에 도착했다.이에 대하여 북한 TV와 신문은 상세한 보도를 하였다.“양빈이 사찰단을 거느리고 평양에 도착했다”는 기사였다.실은 양빈이 인솔한 팀은 ‘신의주 특구’회담을 위한 대표단이었다.양빈과 전체 수행원들은 북한의 배치에 따라 평양 모란봉호텔에 투숙하였다.
그때로부터 나는 양빈의 전기작가의 신분으로,‘신의주 특구’회담의 목격자,기록자와 참여자로 회담 전 과장에 참여하였다.
4월 14일부터 10월 28일까지 6개월이 넘는 기간에 나는 줄곧 선양의 네덜란드촌에 있으면서 양빈과 함꼐 평양을 두 번 방문하고 ‘신의주 특구’회담에 참석하였으며,두 번이나 선양의 네덜란드촌에서 회담에 참여한 기타 구성원들과 함꼐
북한 대표단을 맞이하였고,줄곧 ‘기본법’이 완성되기까지 그 곳에 있었다.또한 10월4일 아침 5시에 양빈이 경찰국에 ‘소환’되는 사태를 지켜본후,10월28일 밤에 이르러서야 나는 마지막으로 네덜란드촌을 떠났다.
내가 네덜란드촌에 있는 기간에 양빈의 몇몇 고모,고모부,그리고 그의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 및 군의 동창들과 그의 네덜란드 및 유리시아그룹의 몇몇 부총재와 소속 지사의 책임자들을 취재하였다.심지어 양빈의 부인 판차오룽(潘朝蓉)이 두 아들을 데리고 네덜란드로부터 선양에 왔을때,나는 그녀와 두 차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반년 남짓한 기간에 양빈과 가장 가까이 지내는 가운데 본래 양빈에 대한 전기를 양빈이 ‘신의주 특구’장관으로 부임한 부분까지 쓰려고 기획했었다.하지만 나중에 발생된 사태의 돌변에 대하여 나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다.
2002년10월4일 새벽 5시 양빈은 선양 경찰국에‘소환’되어갔고,그는 11월27일‘허위 출자,뇌물수수,계약 사기,농경토지 불법점유’등 경제범죄 활동에 연루되어 정식으로 체포되었다.
양빈은 아직도 이렇듯 많은 ‘수수께끼’즉 그의 출신,유학,창업 등등 면에 신비한 베일이 씌워져 있는 만큼,이로써 족히 뭔가를 말할 수 있잖은가고 친구들은 나에게 집필을 권고하였다.하지만 이 일체는 그리 중요한 게 못 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양빈에 대해 말한다면,세상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이 바로 ‘신의주 특구 장관’이란 베일이며,이는 북한의 경제개혁과 개방정책을 파악하고 나아가 동북아평화와 발전을 도모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은 의심할 바가 없다.
친구들의 충고에 나는 한때 망설이고 있었다.필경 이 ‘사건’의 발생은 너무나도 돌발적이어서 나로서는 한동안 침묵 속에 사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필경 나는 국제문제의 전문가가 아니며 단지 작가에 불과할 뿐더러 내가 직접 그 속에 개입된 상황이어서,만약 내가 이에 대한 책을 쓴다면 과연 잘 쓸 수 있을런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사실 그대로 쓰면 뭐가 잘못될 것 있겠습니까?”
친구들은 여전히 내가 집필하도록 격려해주었다.
그떄 나의 머리 속에는 나의 은사이신 양셴전(楊獻珍)스승님이 나에게 가르쳐 주신 훈시가 떠올랐다.
“어떤 때이든지 간에,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모두 진실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해야 하니라. 이는 사람 됨됨이에 첫째로 가는 큰일임을 잊지 마라.사람 됨됨이도 이렇거니도 이렇거니와 학문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하니라!”
재삼 심사숙고를 거친 나는 끝내 집필하기로 작심했다.

歷史將會記住他們!
양빈대표단 리포트
양빈(楊斌)조장 네덜란드 국적 중국인,기업가
마닝(馬寧)부조장 네덜란드 국적,박사
리강(李剛)부조장 유라시아그룹 부총재
리잉저우(黎瀛洲)부조장 홍콩 변호사
왕스푸(王時福)기획고문 난징대학 지리학부 교수
둥롄파(佟連發)법률조 조장 랴오닝법학원 부원장,국제법 전문가
뤄웨이젠(駱偉健)고급 법률고문 마카오법학원 교수
양다융(楊大勇)법률고문 둥롄파법률사무소 변호사
추이양(崔揚)법률고문 둥롄파법률사무소 변호사
리쑤(李肅)고급 정책고문 컨설팅 회사 사장
저우팡성(周放生)고급고문 모 금융연구소 부소장
왕 뤄(王諾)항구고문 항구설계 전문가
왕후이동(王惠東)고급고문 박사,상하이 푸둥 하이테크회사 이사장
웡융시(翁永曦)고급고문 전 중공 관리,전 중국 총서기 자오즈양 측근
차오성리(喬勝利)고급고문 전 선전시구 특구건설 총지휘자
관산(關山)고급고문 작가


북한 대표단 리포트
김동규(金東奎) 평양원예총회사 사장
계승해(桂勝海) 조선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제1부위원장
허명규(許明奎) 조선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법률담당 부위원장
이수길(李秀吉) 조선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고문
안기우(安基宇) 조선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부위원장
김명철(金明哲) 조선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국장
이덕송(李德松) 조선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고문국장
김광혁(金光革) 조선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부국장
박성호(朴成浩) 조선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통역
한선생 조선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통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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