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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훔친

제1장 김정일이 양빈을 선택한 이유

‘포부스’가 선정한 중국 대륙 부자 랭킹 2위인 양빈

북한에서 양빈을 부른다
2001년 1월 15일부터 20일까지 북한노동당 총서기 김정일은 중국을 비공식 방문했다.
방문 기간 김정일은 상하이를 4일간 시찰했다.주룽지 총리는 상하이에서 김정일 총서기를 회견하고 상하이시 기획전시관과 상하이 통용자동차(제너럴 모터스)유한회
사,상하이화흥NEC전자유한회사를 안내했다.황쥐 상하이시 위원회 서기가 상하이의 개혁개방 진정상황에 대해 소개하고 북한방문단을 푸동(浦東)개발신구와 상하이베이얼회사,상하이증권거래소,상하이보산철강그룹,장강하이테크원구와 손교현대
농업개발구역 등을 안내했다.
김정일은 상하이 방문을 통해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그는 베이징에서 장쩌민과 가진 회견에서 “중국,특히 상하이가 개혁개방 이후 이룬 거대한 변화는 중국공산당이 실행하고 있는 개혁개방 노선이 정확했음을 증명한다” 라고 소감을 피력했다.김정일은 상하이 손교현대농업개발구를 참관하는 가운데 유리온실에서 자라고 있는 각종 채소류와 천태만상의 화훼류에 깊은 흥미를 보였다.
농업문제는 계속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북한 경제발전의 걸림돌이자 돌파구라는 모순을 안고 있었다.김일성은 생전에 북한이 언젠가는 농업현대화를 달성해야 한다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죽을 때까지 달성하지 못했던 것이다.1994년부터 1997년까지 북한은 3년 연속 자연재해를 입어 본래 낙후돼 있던 농업이 쇼크상태에 이르렀다.
김정일도 계속해서 북한농업의 출구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그러던 중 상하이 손교현대농업개발구를 참관하게 된 김정일은 이것저것 자세히 물어보았다.그는 유리온실 설비가 어느 나라에서 생산되는지에 대해 물었으며 1헥타르 경영에 돈이 얼마나 드는지도 물었다.또 1헥타르의 유리온실에서 채소가 1년에 얼마나 생산될수 있는지,무슨 야채와 화웨류를 재배하는지도 물었다.
김정일에게 최대의 흥미를 불러 일으킨 것은 토마토와 피망의 모종이였다.종자로 번식시키지 않고 땅에 심지도 않으며 식물포자 분열을 통해 재배하며 배육병(培育甁)에서 뿌리와 줄기와 싹,이파리까지 나오니 말이었다.그런 연후 어린 모종을 영양액이 든 작은 플라스틱 화분에 심어 토마토가 밑으로부터 위로 열리며 12개월을 생장하는데,토마토 열매가 계속해서 결실을 맺고 성숙해 1년 내내 수확을 거둘 수 있는 사실에 큰 관심을 보였다.하이테크 기술과 공장화 농업생산 모델은 김정일에게 새로운 시야를 안겨주었으며 그에게 지대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김정일은 귀국하는 도중에 중국의 변경도시인 단둥(丹東)역에 도착해 중공 랴오닝(遼寧)성 위원회,중공 단둥시 위원회 ,시정부 및 군대 책임자의 환영과 환송을 받았다.의례적인 행사였다.
김정일은 장청샹(張成相)중국공산당 랴오닝성 위원회 부서기,차이톄푸(蔡鐵夫)
시위원회 서기,장줘융(姜作勇)시장을 그의 객차 안으로 불러 30분 동안 우호적인 담화를 가졌다.예컨대 단동시의 경제,시정 건설,고속도로,농업문제가 그의 관심사였다.그 중에서도 최대 관심사는 농업문제였다.
차이톄푸 총서기가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해주었다. “김정일 총서기가 단둥에서 농업 하우스가 없느냐고 물었습니다.보통 온실인지,고급 온실일지,보통 1무(6.667아르,즉 6,000평방尺)의 하우스를 세우는 데 얼마나 드는지?나는 고급온실이라면 1무당 5만위안 정도가 들고 지상에 비교적 낮은 높이로 짓는 거라면 몇 천위안이면 된다고 대답했습니다.”
“김정일 총서기는 온실 1무에서 생산량이 얼마나 되는지도 물었습니다.그리고 어떤 품종을 심느냐에 대해서도 물었습니다.”
김정일 총서기는 단둥시의 경제,시정건설에 대해서도 질문했다.그때 단둥에서는 단둥-선양(瀋陽)간 고속도로를 건설 중이라고 하니 그는 기뻐하며 이렇게도 물었다.
“언제 완공됩니까?”차이톄푸가 대답했다. “2002년 9월에 완공됩니다.” “단동-선양 고속도로는 길이가 얼마나 됩니까?” “230킬로미터입니다.” 김정일이 다시 물었다.
“자동차로 시속 얼마나 달릴 수 있습니까?” “100여 킬로메터입니다.” 곁에 있던 장청샹 랴오닝성 부서기가 대답했다.김정일이 그 말을 듣고 웃으며 물었다. “고속도론데 그렇게 느립니까?”장청샹이 설명했다. “산지가 많아서 설계는 120킬로미터로 했는데 160킬로미터까지 달릴 수 있을 겁니다.” 김정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군요.알맞은 시기에 다시 단둥과 랴오닝을 방문해서 단둥-선양 고속도로를 보고 싶습니다.우리도 평양에서 신의주까지 고속도로를 건설해야 하니까요.”차이톄푸는 그날 김정일 총서기의 단둥역에서의 만남을 이야기했다.
“기차 안에서 김정일 총서기는 정말 즐겁게 이야기했습니다.단둥의 농업에서 무당 벼는 최고로 얼마나 생산하는지,옥수수는 얼마나 거둬들일 수 있는지,화학비료는 어떻게 공급하는지에 관해 물었습니다.그는 아주 폭넓게 질문했는데 특히 농업에 관해서 가장 많이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인 것을 물어보았습니다.수행원이 김정일 총서기에게 떠날 시간이 됐다고 하자 할 수 없다는 듯이 일어나 우리를 보냈습니다.”
김정일은 귀국 후 즉시 중국주재 북한대사관에 중국의 유리온실에 관해 자세히 보고하라고 했다.보고자료는 신속하게 그의 책상에 도착했다.그 중 보고서에 유리온실 설비와 기술의 최대 공급자는 양빈(楊斌)이라는 네덜란드 국적의 중국인이라는 것이 나와 있었다.게다가 그 인물이 현재 자금과 인력을 집중 동원해서
선양에 네덜란드촌이라는 현대농업 생산기지를 건설 중이라는 것도 적혀 있었다.
김정일은 관련 부문과 중국주재 북한대사관,선양 영사관에 지시해 양빈과의 정식 대면을 추진시켰다.
북한의 외국주재 한 무역회사의 사장이 먼저 네덜란드촌을 방문해 양빈을 예방했다.그는 완공된 4헥타르 유리온실을 참관한 뒤 양빈과 상세한 이야기를 나누었다.며칠 후 그 사장은 선양주재 북한 영사관 수석 영사를 대동하고 다시 양빈을 찾아왔다.그들은 북한 무역성과 경제협력추진위원회,농업성,원예총사를 대표해 양빈을 평양으로 초청했다.
2001년4월,양빈은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했다.당시 평양에 도착했을 떄 양빈은 아주 열정적인 대접을 받았다.그는 북한정부가 국빈을 대접하는 모란봉호텔에 묵었다.
양빈은 바쁜 일정 속에 북한의 주요 관리들과 몇 차례에 걸쳐 회담하였다.네덜란드유라시아그룹의 명의로 북한 원예총사와 합작하기로 하고 두 회사가 공동으로 투자하는 평양-유라시아 합영회사를 설립하기로 했다.합영회사는 김일성기념당에서 멀지 않은 평양시 용성구 화성동에 북한 최초의 현대농업시범구를 건설해 김일성이 생전에 발전시키고자 했던 북한 농업현대화 구상과 유지를 기리기로 했다.
2001년6월30일,쌍방은 공동으로 평양-유라시아 합영회사의 규정을 완성하고 조직을 구성했다.총자산은 2.200만 달러,양빈이 자금과 설비,기술을 투자하고 70%의 지분을 차지하기로 했고,북한은 땅과 인력을 제공하고 30%의 지분을 갖기로 했다.
2001년 7월20일,쌍방은 평양에서 조인식을 가졌다.양빈이 북한 농업현대화 계획에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선양 네덜란드촌에서 양빈이 손님들에게 온실상황을 소개하고 있다.



양빈이 투자한 평양 온실 건설현장에 도착한 양빈 대표단과 북한 대표단,왼쪽으로부터 북한 수석대표 김동규,세번쨰가 양빈이다.


양빈,평양에 농업시범구를 건립
2001년 7월 21일 양빈 일행은 선양으로 돌아왔다. 그는 바로 유라시아그릅(欧亚集团)의 부총재인 리강(李刚)을 주축으로 평양에 농업시범구 건설을 추진할 팀을 구성했다. 그리고 MBA학위와 관리경험을 가진 거셴민(葛憲民)을 평양—유라시아 합영회사의 사장, 왕위민(王玉民)을 부사장에 취임시켰다. 이들 두 사람은 평양 농업시범구의 사공과 기술관리 및 유라시아 사람들이 평양에 들렸을 떄 접대하는 임무를 맡았다. 평양 농업시범구의 기술총책임자는 구지앤핑(谷建平) 교수 및 네덜란드인 전문가로 정했다.
필자는 2002년 4월 평양을 방문해 처음으로 화성동 농업시범구를 참관했다. 그 곳의 유리온실은 이미 구조물 설치가 끝낫고 온실내부의 파이프 공사를 비롯한 관개 계통을 설치하고 있었다. 태양광선이 쏟아져 들어오는 유리온실 안에 각종야채, 토마토, 피망, 가지, 참외, 오이 등이 자라고 있었다. 주렁주렁 달린 열매들이 보는 사람을 기쁘게 했다. 북한 직원들이 채소를 따서 상자에 놓는 포장작업이 진행되는 것과 동시에 이것들을 시내로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온실들은 언제 완공됐을까? 물론 지난해 겨울에 시공할 수는 없었겠지? 750무에 이르는 온실, 엄동설한에 모중들은 모두 어디서 가지고 왔을까? 많은 질문이 줄을 이었다. 나는 참관을 마치고 간이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왕위민 부사장에게 물어보았다.
왕위민이 설명했다.
“여기는 조선의 첫 현대농업시범구입니다. 보신 것은 제1기 공정 50헥타르뿐입니다. 유리온실은 6헥타르, 즉 6만평방미터입니다. 양광온실(阳光温室)은 76동, 동당 1무에 이릅니다. 이것은 산둥의 서우광온실(寿光温室)을 모델로 해서 개조한 것입니다. 양광온실 뒷벽의 토층은 서우광온실보다 훨씨 두껍습니다. 온실대문 바로 앞에 통일된 규격의 작은 집을 지어 정결하고도 아름다우며 따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조선 사람들이 어떻게 빨리 완공할수 있겠느냐고 물어왔습니다. 평양 시민들이 겨울에도 채소를 믹을수 있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양사장이 조선에서 시공을 책임진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2001년 12월에 조선 군대와 노동자, 현지 농민들이 동원됐습니다. 가장 많이 왔을 떄는 5만 명이 동시에 달려들어 부지 정리와 하우스 건설에 나섰습니다. 공터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붉은 깃발이 나부끼면서 조선인민군문공단 배우들의 춤과 노래소리가 하늘과 땅에 울려펴졌습니다. 이런사람을 감개무량하게 만들던 대장면은 지금 중국에서는 볼 수 없는 일이죠. 1958년 대약진 때라면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정말 사람을 격동시키고 감개무량하게 하였습니다.”
중국에서는 이런 모습을 이미 볼 수 없게 됐다. 나는 참지 못하고 물어 보았다.
“조선의 물자공급 상태가 아주 안 좋다던데 공사장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밥을 먹으려면 어떻게 했을까요?”
왕위민이 웃으며 말했다.
“조선의 물자공급은 상당히 어려운 편이라. 그들 보고 해결하라고 하기에는 곤란했습니다. 그래서 수만 명을 2,3개월 간 대대적으로 동원하기 위해 양사장님이 중국에서 쌀과 돼지고기, 야채,두부,식용품,심지어 휘발유, 경유까지 모두 우리 쪽에서 공급해 해결한 것이지요.”
“2002년 1월에 76동의 양광온실이 완공됐습니다. 각종 채소 모종의 정상적인 발육을 위해 네덜란드촌은 미리 준비를 마쳤고 토마토 같은 것은 우리가 고른 네덜란드품종으로 썼습니다. 선양에서 보온자동차를 통해 모종을 평양까지 배달해왔습니다. 한번에 차 열 몇 대씩 세 차례에 걸쳐 운송했습니다. 그 뒤 중국의 농업기술원이 지도해 모두 76동에 해당하는 양광온실에 모종을 심었습니다. 현재 수학이 가능한 채소는 오이, 가지, 고추, 피망, 토마토, 호박, 상추, 쑥 등 10여개 품종에 이르고 있습니다.”
2002년 3월을 시작으로 해서 유라시아—평양 합영회사의 온실에서는 계속해서 신선한 야채가 자라서 끊임없이 평양의 외국인들과 시민들에게 공급했다. 이렇게 해서 유라시아그룹과 양빈의 이름이 평양에서 나돌기 시작한 것이다.
양빈은 평양에 북한 최초의 현대화 농업시범기지를 건립하였다. 북한의 당과 관리자들은 물론 양빈을 대단한 인물로 보았을 것이다. 북한은 1994년 수재 이후 연속 3년 동안 농산물 수확이 감소됐고 수리시설 또한 심하게 파괴돼 있었다. 일부 국가들의 대북한 경제봉쇄령 떄문에 이 나라의 경제는 설상가상의 경지에 빠지게 되였다. 국제사회의 원조도 턱없이 적었고 어떤 국가에서는 원조에 조건을 달기조차 했다.
양빈의 유라시아그룹과 북한의 원예총사의 합작은 명의상으로는 합자회사였지만 실제로 70%의 지분을 소지한 양빈은 그 곳에서 생산된 신선한 야채에 대해 1센트의 수입도 받지 못했다.
양빈이 투자한 평양온실 건설현장 모습


양빈이 투자한 평양 화성동 농업기지에서 양빈 대표단 몇몇 구성원 앞줄 왼쪽으로부터 마닝, 왕후이둥, 양다융이고, 뒷줄에 차오성리이다.
북한의 현상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다 잘 알고 있는 일이겠지만 북한은 공급제, 저수입, 저소비 국가이다. 북한의 국민은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무상으로 의무교욱을 받고 의료서비스와 주택을 공급받는다. 농업합작사의 농민을 제외하고(그들은 집체 소유제에 속하므로 농업합작사에서 물자를 공급받는다.) 노동자, 군인, 간부, 정부관리, 지식분자 등은 봉급을 받는다. 비록 직종에 따라 봉급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보편적으로 저수입, 저소비 생활을 하고 있다. 그들은 의무교육, 의료서비스, 주택제공 외에 배급을 받고 있다. 예컨대 식량과 식용유, 야채, 생활필수품을 배급받기 때문에 돈을 쓸 데가 별로 없다.
북한의 보통 노동자라면 매달 북한돈 몇십 원의 봉급을 받을 것이다. 간부의 월급이라 해도 100여 원 정도다. 내가 알고 있는 외무성, 무역성의 관리들도 200여 원쯤 될까말까 한 정도다. 나는 여러 명의 장관급 관리들에게 월급이 어느 정도인지 물어본 적이 있다. 그들은 웃으며 정확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나의 어꺠를 툭툭 치면서 “적습니다. 선생님보다 틀림없이 적을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한 번은 연회가 끝난 뒤 잘 아는 국장급 관리에 한 차관급 관리를 가리키며 “저 양반의 월급은 당신보다 얼마나 많아요?”하고 물어보았다. 그 국장급 관리는 내가 평양에 갈 때마다 중화담배를 사주면서 얼굴을 익혔기 떄문에 친한 사이였다. 감정이 통하는 데가 있었을까. “저보다 몇십 원 많을 겁니다”라고 대답이 나왔다.
그렇다면 북한 화폐와 중국돈, 미국돈의 환율은 얼마일까? 통역을 맡은 북한 청년 박성호(朴成浩)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중국에 유학한 적이 있어 중국말을 유창하게 한다. “조선돈은 외국돈과 직접 맞바꿀수 없습니다. 조선에도 예전 중국의 태환권(兑换券)처럼 바꿀수 있는 돈이 있기는 합니다. 만약 태환권이 아니라면 1달라는 조선돈 215원 입니다.”
그렇다면 북한의 보통간부 월급은 50센트 정도가 되고, 국장급관리는 1달러 조금 넘는다는 예기가 된다. 그러나 북한의 노동자, 간부, 지식인들은 월급을 받아서 생활용품이나 식품 몇 가지만 사면 되므로 그나마 돈이 얼마들지 않는다. 그들은 북한 돈을 모아서 태환권으로 바꾸어 수입품 상점에서 물건을 사기도 한다.
시민들은 야채마저도 정부로부터 공급받기 때문에 평양 유라시아 합영회사가 생산한 야채를 시민들에게 팔수가 없다. 정부가 일부분 비용을 보조해주기는 하지만 평양시 정부는 달러로 이 비용을 지불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냥 장부상에 기재만 해놓는 것이다.
북한 정부는 양빈의 평양 농업시범구 사업의 보조금을 지불하고 감사를 표시하기 위해서 다른 방법을 통해 보상하기로 했다.


북한, 양빈에 신의주 경제특구를 제안
2001년 11월부터 2002년 1월까지 평양 현대농업시범구가 대대적으로 건설되던 시기에 양빈은 평양과 선양 사이를 몇번 오갔다. 그는 평양에 갈 때마다 국빈 대접을 받아 모란봉호텔에 투숙했다. 북한측은 양빈에게 좋은 음식을 대접하려고 애썼고, 생선과 소고기를 내놓기까지 했다. 겨울에는 배추, 감자, 무도 있었다.
한번은 양빈이 만찬을 마치고 귀빈식당에서 나왔을 떄, 마침 그를 안내해주던 북한의 한 관리를 만나게 되였다. 그는 아무 생각도 없이 북한 관리들이 식사하는 식당 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때까지 밥을 먹고 있던 관리들이 양빈을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그때 양빈은 북한 관리의 식탁 위를 둘러보았는데, 쌀밥과 간단한 국 그리고 김치가 전부였다. 이들 관리들은 외무성, 농업성, 원예총사의 주요간부들로 직급이 적어도 외무성 경제국 부국장은 되었다.
양빈은 2층으로 올라가서 혼자 응접실의 소파에 앉아 깊은 시름에 잠겼다.그는 담배가 타들어 손가락이 뜨거워지는 것조차 모를 정도로 생각에 빠져 있었다.그 자리에서 그는 두 가지 중요한 결정을 했다.
먼저 평양-유라시아 합영회사에 전화를 걸어서 거셴민사장,왕위민 부사장에게 선양과 단둥으로부터 가져온 고기와 계란 야채등을 모란봉호텔에 보내 북한 관리들의 식사를 개선하도록 했다.
다음으로 그는 북한 원예총사 김동규 사장 등을 그의 응접실로 불러 평양 농업시범기지의 대규모 건설작전에 대해 들은 다음 그들에게 관리들의 생활이 이렇게 힘든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파 무상으로 쌀을 기증하겠다고 밝혔다.
사실 평양 체류중 양빈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평양 소년궁에서 아이들의 공연을 봤을때였다. 양빈은 어린 예술가들의 훌륭한 공연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앉아 있던 김동규 사장이 말했다.
“김장군께서는 아이들이야말로 조국의 미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맞습니다. 중국에도 조국의 꽃봉오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양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공연이 끝난 뒤에 양빈은 아이들의 작은 손을 잡고 그들의 야윈 얼굴을 바라보았다. 양빈의 마음은 너무나 괴로웠다.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을지도 모를 일이다. 중국이 가장 곤란했던 시기,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할머니가 차를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다. 두 사람은 서로 기대어 목숨을 유지했던 것이다. 그는 북한 관리들의 얼굴을 처음 대했을 때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는 곧바로 배 한 척 분량의 햄버거를 평양 아이들에게 기증하기로 결정했다.
2002년 1월 14일부터 22일까지 양빈은 리강, 볜서우제, 저우샹 등 유라시아그릅 사람들과 네덜란드 농업시범기지의 건설상황을 시찰했다. 이어서 양광온실의 모종 생장상태를 확인하는 한편, 유리온실의 구조 시공에 관한 여러가지 문제를 가지고 북한측과 협의를 했다.
양광온실 안은 봄처럼 따뜻했다. 유라시아 농업기술자들의 세심한 관리하에 야채모종들은 잘 자라고 있었다. 토마토와 오이, 꼬투리 콩이 이미 줄기를 벗기 시작했고, 작은 꽃을 피워 보는 사람을 기쁘게 했다. 북한 관리들은 양빈과 함께 시찰을 마친후, 그에 대해 만족해했다.
1월 22일 저녁, 북한 원예총사가 모란봉호텔 1층에서 양빈 일행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가 끝난 뒤, 김동규 사장은 2층 양빈의 응접실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김사장은 앉자마자 말했다.
“양빈 총재님, 당신은 조선인민의 친구입니다. 당신은 조선을 위해서 아무 대가없이 너무나 많은 공헌을 했습니다. 저는 김장군과 조선 정부를 대표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양빈은 김사장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중국에서 자랐기 때문에 애국주의와 국제주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얼마 안되는 돈과 힘을 보태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김사장은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양총재님은 정말 좋은 분이군요. 중—조 양국 인민들의 우의는 피와 불의 시련을 거친 것이죠. 총재님의 조선인민에 대한 감정 또한 진실한 것이며 시련을 거친 것입니다. 당신은 사업가입니다. 주기만 하고 받지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보셔서 아시겠지만 우리 조선은 지금 대단히 빈곤합니다. 그래서 보답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김장군님도 양총재에게 무슨 요구사항이 있다면 모두 말씀하게 하시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조선인민들의 생활이 좋아지기를 기대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제가 제출한 의견을 검토해주시기 바랍니다. 조선농민이 왜 가난하게 살고 있습니까? 그 원인 중 하나는 1년에 절반만 일하고 겨울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되겠습니까? 우리 농업 아이템은 시범구역용이며 유리온실은 건설비가 너무 비싸서 조선에서는 보급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생산한 야채와 화훼류를 일본에 수출하여야 합니다. 조선에서는 양광온실과 비교적 간단한 온실 몇십 개를 보급시켜 그것을 시범구로 만들고 모든 조선인민들이 겨울에도 야채를 먹을수 있게 하겠습니다. 조선 농업을 어떠게 일으켜 세워야 하겠다는 문제에 대해서 제 생각이 따로 있습니다.”
김사장은 너무 기쁜 나머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웃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찬성합니다! 당신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당신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방금 제가 당신을 사업가라고 불렀듯이 사업가는 쳐놓기만 하고 이익이 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봅니다. 이것은 제 개인의 생각이 아닙니다. 양빈 총재님. 이렇게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김사장은 북한 정부를 대신해서 양빈에게 경악할 만한 제안을 했다. 양빈더러 신의주 지역에 27평방 킬로미터를 선택해 경제무역구를 만들고 관리를 해달라는 것이였다. 잘되면 더 크게 확장할수도 있다고 했다.
양빈은 당시에 너무 놀랐다. 한번도 생각해본 일이 없기 때문이였다.
김사장은 과거에 그들이 나진 선봉지역에서 경제특구를 실시해 본적이 있지만 그리 성공한 편은 아니었다고 일러주었다. 중국에서 자라서 서방교육을 받았으며,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무역으로 성공한 상업가에게 이 작은 경제무역구의 정권을 맡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나진 선봉지역의 북한 관리보다 더 많은 권력을 주고 토지는 양빈 개인이 지배하고 거기에서 나는 이익은 양빈이 북한에 트자한 농업사업에 대한 보답으로 여기겠다는 것이었다. 기업과 자본금을 유치하는 일에서부터 모든 일을 그에게 맡기고 심지어 얼마간의 자본주의를 실행해도 괜찮다는 이야기였다.
“양빈 총재, 지금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잘 생각해봐 주십시요.만약 결심이 서면 저에게 일러주십시요. 그러나 한번 대답하면 꼭 성공해야 합니다. 실패하면 안됩니다. 나진 선봉지구보다 훨씬 더 잘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몇몇 간부들은 국가를 대할 면목이 없습니다.”
김사장의 얼굴에는 갑자기 엄숙한 표정이 맴돌았다. 그가 말한‘우리’에는 몇몇 부의 장관급, 국장급 관리들이 들어있을 것이다. 양빈은 김사장을 보낸후, 혼자 앉아서 담배를 비웠다.무슨 생각을 할때 그가 가장 즐기는 스타일이었다.
다음날 양빈은 김사장에게 북한정부가 그를 믿어주는 것과 김장군의 그에 대한 두터운 사랑에 감사를 표시했다.그는 북한 정부가 그에게 설립권을 보장해준 신의주 경제무역구를 받아드렸다.그리고 나진 선봉지구보다 잘 할것이라고 결심했다.
점심에는 북한의 관련부문에서 경축오찬을 베풀었다. 외무성, 무역성, 경제협력 추진위원회, 원예총사 및 기타 부문의 주요관리들이 참석했다.
저녁에는 양빈측에서 답례로 연회를 베풀었다.
다음날 양빈은 김동규 사장과 외무성,무역성 관리들의 안내로 신의주를 조사했다.북한측이 제공한 27만 평방키로미터의 경제무역권은 압록강대교와 중국세관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었고 교통도 아주 불편했다.항구와 비행장이 없어서 국제 투자유치와 건설에 어려운 점이 매우 많았다.
1차 답사가 끝난 뒤 양빈은 북한측에 27평방 킬로밑의 무역구는 반드시 새로 계획되어야 한다고 말했다.국제화 표준에 의해서 건설되어야만 외국기업을 유치할 수 있다고 일러주었다.만약 각종 도로와 기초시설을 건설하고 나면 외국기업가들에게 제공할 땅이 없으며,국제적인 오피스텔을 건설하기는 더욱 힘들다고 말했다.
“외국기업가들과 전문가들이 먹고 마시고 싸고 자는 곳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그들의 부인이나 애인이 오면 어디에서 잡니까?서양사람이나 일본사람도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양빈이 웃으면서 북한 관리들에게 말했다.
계속해서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던 북한 관리들도 그제서야 살짝 웃었다.
“샹젤리제,힐튼 같은 오성급 호텔은 물론이고 별장도 있어야 합니다.서양기업가나 관광객들에게 꼭 보여줘야 합니다.조선 신의주 경제특구의 건설은 세계 어떤 자유무역구보다 떨어지지 않을 뿐더러 심지어 훨씬 멋지다는 것을 말합니다.”
북한 대표단들은 활짝 웃음을 띠웠다.
김사장이 웃으며 말했다.
“양빈 총재님,너무 허풍을 떠는 게 아닙니까?”
양빈이 진심으로 말했다.
“아닙니다.제 말씀은 사실입니다.한선생.”
양빈이 맞은 편에 않아 있던 한 북한 관리를 가리키며 할했다.
“네덜란드촌 별장에 가 보셨잖아요.인상이 어떠셨어요?”
한씨 성의 그 관리는 곁에 있는 북한 대표들에게 말했다.
“양빈선생의 별장구역은 정말 너무 아름답습니다.마카오에 비해 절대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북한 대표단 사람들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양빈이 계속해서 말했다.
“저는 신의주 경제무역구를 세계 일류로 만들겠습니다.유럽의 도시들에 비교할 수 있고 제네바만큼 아름답게 만들겠습니다.
세계 각국의 기업가나 관광객들이 이곳에 와서 풍경을 보고 싶도록 만들고 뭉치로 달러를 털어놓고 가게 하겠습니다.동북아시아의 진주,그 진주는 한국,아 미안합니다.남한이나 일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 신의주에 있도록 하겠습니다.”
양빈의 이야기는 열정적이고 유머러스했으며 아주 선동적이었다.
북한 관리들은 잇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양빈의 마지막으로 또 다른 방안을 내놓았다.즉 비행장과 항구를 특구 안에 두고 무역구의 면적을 확충하겠다는 것이었다.북한 대표단은 중앙에 보고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양빈의 갑작스런 제안에 북한측은 신속하게 대답해왔다.김정일은 양빈총재의 뜻대로 82평방 킬로미터로 특구 면적을 확충하고,북신의주 전부를 그 안에 넣으며 신의주 경제특구로 명명하라고 지시했다.

1997년 북한의 신도 경제무역구 시도 전말
북한이 신의주에서 경제무역구의 아이디어를 시험해본 것은 양빈과의 합작이 처음이 아니다.1997년에도 시도한 적이 있었으나 여러 가지 원인으로 무산되고 말했다.
1997년 초 북한은 미국 국적의 박경윤 여사에게 평안북도 신도(薪島)와 주단도(綢緞島) 일대를 개강하는 아이디어를 냈다.북한은 1994년부터 3년 연속 대형 수재를 입어 논에서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하였다.일개 농업국가로서 3년간 아무 수확도 얻지 못했으니 식량부족으로 인한 공황상태는 가히 상상할 만 하다.그런데다 미국 등 서방국가가 북한에 대해 경제봉쇄를 실시하는 바람에 북한은 더욱더 곤란한 지경에 처해있었다.중국과 러시아 등 북한의 우방들이 원조의 손길을 펼쳤지만 부족하기 짝이 없었다.
미국 국적의 박경윤 여사는 국제주의 정신과 민족애의 마음으로 쌀과 석유 등을 무상원조해왔다.그러나 일개 사업가의 재력은 한계가 있었다.그는 친한 친구들과 국제사회의 자선단체들에게 모금협조를 요청하고 북한 사람들의 급박한 식량문제와 구호물품을 모으는 데 앞장섰다.박경윤 여사는 이 일로 김정일의 호감을 샀다.그리하여 북한 정부는 감사의 표시로 북한 아시아태평양 평화위원회를 통해 박여사가 회장으로 있던 금강산 국제그룹과 회담을 갖고 신의주 소속의 주단도와 신도의 개방권을 박여사에게 위탁하기로 했다.그러면서 그녀가 외국자금을 끌어들여 공동으로 토지를 개발하고 관광.무역 등의 경제활동을 하는 ‘신도,주단도 경제무역구’를 설립하기를 희망했다.
1997년3월9일 한국의 ‘중앙일보’안의창(安熙昌).오영환(吳永煥)기자가 이 소식을 접하고 이렇게 보도했다.

북,薪島 개방區 지정
압록강 하구 면세 쇼핑센터,카지노 건립
모든 외국인 비자 면제… “한국 자본도 환영…”

북한이 평양북도 압록강 하구의 신도군을 모든 외국인에게 비자없이 통과,체류를 허용하는 개방구로 지정,개발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소식통은 8일 “북한은 신도군에 카지노 등을 설립한다는 계획 아래 금강산 국제무역개발회사 (회장 박경윤 朴敬允)에게 사업을 위탁했다 .”고 말했다.
소식통은 “북한이 신도를 개방구로 지정한 것은 중국의 부유층을 비롯한 관광객을 유치,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신도 개방은 홍콩의 중국 반환(7월1일)에 따르는 ‘홍콩 수요’를 끌어들이겠다는 차원에서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북한 정부는 또 이 지역을 전면 개방한다고 해도 북한 주민에 미치는 영향이 거의 없다는 점을 고려한 것으로 전해졌다.
소식통은 “금강산국제무역개발측은 신도 개발을 위해 화교자본을 끌어들이는 방안을 강구 중이나 한국자본을 포함한 어느 자본이 들어와도 관계없다는 입장”이라며 “면세 쇼핑센터를 건설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신도군는 압록강 하구의 삼각주,전체 면적이 81평방 킬로미터로 주단도(71평방킬로미터)와 마안도(麻安島),장도,말도,노적도(怒積島),싸리섬(煞利島),
사리도(四里島)등 일부 섬으로 이뤄져 있다.주단도에 화확섬유 원료기지 등 소규모 공장이 건립돼 있다.원래 평북 용천군에 편입돼 있다 분리됐으며 현 행중구역은 신도(薪島)는 1개리(黃金坪),2개 농장구역이 전부이다.
신의주까지는 길이 22.5킬로미터의 해로가 나 있으며,단동시와는 0.5-3킬로미터가량 떨어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 북한정부가 조선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를 통하여 박경윤 여사에게 위촉장을 준 것은 ‘중앙일보’ 기사가 난 후인 1997년4월3일이었다.해당 위임장 전문은 다음과 같다.

위 임 장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영토 주단도를 국제 관광 지역으로 개발하기 위한 사전 준비작업을 하기 위하여,금강산국제그룹의 박경윤 회장에게 아래와 같은 권한을 부여한다.
1. 주단도 개발의 총 계획서를 작성한다.
2. 다른 나라의 기관이나 기업가의 자본금을 유치하여 그와 더불어 합자경영을 할 준비작업을 한다.
3. 국제관례에 따라 주단도 토지사용과 관계되는 자료조사 작업을 하여 각종 형식의 토지 사용에 관심을 가진 외국인과 외국기업에 대하여 알아본다.
4. 주단도 외국인 관광계획을 제정한다.
금강산국제그룹은 위촉한 권한을 행사할 때 반드시 조선아시아태평양위원회 또는 조선아시아태평양위원회가 지정한 공화국의 관계기관과 밀접한 협력관계를 유지해야 하며 모든 사업과 활동은 반드시 공화국의 관계법규에 의거하며 공화국의 정치,경제 이해관계를 보증하는 전제하에 진행해야 한다.
조선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1997년4월3일

박경윤 여사는 공식 위촉장을 수여받은 후 개인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주단도와 신도는 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 단동시를 바라보는 곳이므로 중국 랴오닝성 단둥시의 지지를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하였다.
1997년4년 9일부터 15일까지 박경윤 여사는 금강산국제그룹회장의 자격으로 단둥시를 방문하여 단둥시 정부 지도자와 신도를 개발할 데 관한 의견을 교환하고 비망록도 남겼다.

단동시 정부 지도자와 금강산국제그룹 회사 박경윤 여사 신도를 개발할 데 관한 담화 비망록
1997년 4월 10일 10시경, 단동시 인민정부 류팅야오(刘廷耀)시장, 탕융린(唐永林), 미커친(米克勤)부시장, 쑤용성(苏永胜)비서실장, 대외경제위원회 주임 겅런타오(耿仁涛)등은 시정부2층 회의실에서 조선 금강산국제그룹 회장 박경윤여사 일행과 신도를 개발할데 관한 사항을 의논하였다.
의논 중 박경윤 여사는 류팅요우 시장에게 조선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에서 박경윤 여사에게 수여한 신도 개발 위임장을 제시해 보였다.
다음은 박여사의 말이다.
이 위임장은 임시적인 것이고 향후 정무원의 명의로 나에게 정식 위임장을 수여할 것이다. 그러나 본 위임장이 있으므로 신도개발의 사전 준비작업을 진행할수있다. 개발은 먼저 신도, 주단도부터 시작하고 앞으로 황금평으로 확정한다. 신도를 개발하는 총체적 계획이 나오기 전에 먼저 관광과 무역을 시작하려 한다. 장기적인 시각에서 신도를 홍콩과 같은 지역으로 만드는 것이다. 신도를 개발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금문제이다. 이면에서 단둥시만 의지해서는 안된다. 한국, 홍콩, 대만, 일본을 설득시켜 그들의 자본금을 유치해야 한다. 단동과 협력하면 외국사업가의 환경과 지지를 받을수 있다. 외국 사업가들을 유치하는거은 내가 책임지고 국내 사업가의 유치는 단둥시가 책임지기 바란다. 신도의 대외개방 흡인력을 높이기 위하여 나진. 선봉 자유무역구와 같은 정책을 실행할 것이며 어떤 면에서는 더욱 혜택을 주는 정책을 실행할 것이다.
협력의 편리를 위하여 쌍방은 단둥에 협력 조직을 설치한다. 중국측에서는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을 파견할 것을 바라며 조선측에서도 사람을 파견하여 올것이다. 5월 상순에 다시 단둥에 올것을 약속하고 그때 단둥시 관계인사와 신도에 시찰하러 갈 계획이다. 신도 시찰에 참가할 단둥시의 명단(10인 가량)은 내가 평양에 가기전에 단둥시 정부로부터 제공해주기 바란다. 단둥에서 신문발표회를 가져야 한다.
다음은 류팅야오 시장의 말이다.
박경윤 회장이 신도 개발의 위임장을 받은데 대하여 축하를 표시함과 어울러 단둥시 정부는 박여사와 협력하여 신도 개발사업을 잘해나갈 것이다. 신도를 대외로 개방한다는 신문발표회를 5월18일 단둥시의 실크축제떄 하면 좋겠다.
신도의 대외개방을 맞이하기 위하여 단둥시 정부는 이미 관련된 준비작업에 착수하였다. 만약 박여사에게 무슨 생각과 요구가 있다면 수시로 제출하기 바란다. 단둥시 정부는 힘껏 합력할 것이다. 만약 기획면에서 단둥시의 협력이 필요하면 단둥측도 지지해줄수 있다. 신도 개발이 단둥시에 관계되는, 이를데면 서로 소통하고 합력할 일은 단둥시 대외경제위원회 겅런타오 주임이 책임질 것이고 뉴스발표회를 합력하거나 준비하는 일은 쑤융성비서실장이 실크축제 사무실과 대외경제위원회를 조직하여 책임지고 할것이다.
1997년 4월 14일
담화 비망록에서 보다시피 박경윤 여사는 신도 경제무역구를 홍콩식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소식통에 따르면 이것 역시 조선정부의 인가를 받은것이라고 한다.
결과적으로 신도경제무역구가 설립되지 못한 원인은 박경윤여사가 외국사업가 유치를 하지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단도에 군사시설이 있기 때문에 북한의 군부에서 경제무역구 설립을 동의하지 않는것이 원인이라는 설과 그외 다른 요소도 작용했다는 설도 있다.
어쩆든 북한이 1997년에 압록강 입구의 몇몇 섬에서 개방정책을 실시하여 경제무역구를 건립하고자 했던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4년후 북한은 옛 일을 다시 들이켰다. 다만 파트너를 바꾸어 양빈으로 하여금 이 무거운 짐을 지게 하였을 뿐이다. 이번에는 지역적으로 몇개의 섬이 아니고 경제무역구도 아니다. 양빈의 발걸음은 더 멀리, 더 빨리 움직이게 되였다. 그는 자신의 고문 및 전문가들과 함께 이 일을 밀고 나가야 했다. 북한 정부는 최종적으로 김정일의 승인을 받아 2002년9월23일 신의주 특구계획을 공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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