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폴란드에서 캐낸 첫 금노다지
폴란드의 WTO가입을 기회로
19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 동유럽 사회주의국가들에 거대한 변화가 발생했다.바로 동유럽 대가족 시스템이 무너진 것이다.1990년 초 첫 몇 주일 동안 사람들은 깜짝 놀라게 한 첫 소식이 바로 동독공산당 중앙이 자신들의 총서기인 호네커(Honecker)를 쫓아낸 일이었다.그 뒤를 이어 체코슬로바키아가 연합정부를 구성했다.공산당은 정부의 소수를 차지하는 데 그치고 말았으며 대통령은 또한 어느 당파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이 당선됐다.
또 다른 소식이 뒤를 이어 들려 왔다.불가리아공산당 서기장 지프코프
(Todorzhivkov)가 출당됐다.동베를린에서는 최소한 1백만 명이 넘는 소련과 동유럽 인민들이 무너진 베를린 장벽을 넘어 서독으로 달아났다.1990년 12월12일,폴란드 원로 대통령 야루젤스키(Wojciech Jaruzelski)가 새 대통령에게 권력을 승계하기 전날 ‘대국민 고별담화’를 발표했다.24개 서방국가의 외교부 장관들이 브뤼셀에 모여 공동출자한 40억 달러로 폴란드의 새 대통령인 바웬사의 경제개혁을 지지하고 나섰다.
그 무렵 네덜란드에서 고학하고 있던 양빈은 모두 중국유학생과 마찬가지로 이 같은 동유럽의 대변혁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1991년 폴란드 대통령에 당선된 바웬사가 전면적인 개방을 추진했다.폴란드는 하루 아침에 WTO에 가입했다.양빈은 예리한 눈으로 동유럽 시장경제가 점진적으로 개방될 것을 통찰했다.어마어마한 기회가 바로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기업가라면 기회를 포착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양빈은 창업의 첫 걸음은 선택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그는 자신이 네덜란드에 유학하고 있을 떄 유럽에 대한 관찰을 통하여 유럽을 충분히 이해했다고 말한다.그러나 그는필경 중국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다.양빈은 다른 사람들이 그떄까지 눈을 돌리지 않고 있는 분야를 선택하기로 했다.왜냐 하면 거기에는 전쟁자가 없기 떄문이다.그는 예리한 눈으로 남보다 먼저 개방한 폴란드가 기회라고 판단했다.그리하여 바르샤바에서 폴란드 사상 최초의 민영기업을 등록했다.이 일은 당시 폴란드와서방 매스컴으로부터 커다란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양빈은 자신이 네덜란드에서 아르바이트로 모은 2만달러를 국제무역에 투입하기로 했다.그는 먼저 자신의 고향인 중국난징으로 갔다.그곳에서 동창이며 친구,전우,선생님을 포함한 그의 인맥이 있기 때문입니다.그는 자신의 계획을 여러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친구들은 아이디어를 내가며 그에게 여러 사람들에게 소개해 장슈성(江蘇省)일대의 향진기업(중국의 響은 한국의 면,鎭은 읍에 해당됨)에서 싸고 좋은 의류,일용품을 살 수 있도록 당시 장수성의 실크-방직수출회사의 사장들을 소개해주었다.
1990년대 장쑤성 방직수출회사의 사장으로 있던 류지옌(劉健)이 그 무렵 양빈이 그와 접촉하며 방직품을 구매하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내가 양빈을 처음 만난것은 1995년쯤이었습니다.그는 이미 동유럽에서 사업을 시작해 1,2년쯤 무역에 종사한 듯 했습니다.그는 처음에 장쑤성 실크회사와 먼저 접촉해 사업상 거래가 있었습니다.나중에 친구의 소개로 방직품회사로 왔지요.그해에 장쑤성 실크회사와 방직품 회사가 분리됐으나 두 회사 건물은 붙어 있어서 실크회사쪽 친구가 양빈을 데리고 저에게로 왔습니다.그들은 방직품 본사 산하에서 의류무역을 했던 것입니다.”
“그 무렵 중국 방직품의 품종은 많았으나 주로 미국과 유럽에 수출하고 있었습니다.
양빈은그떄 갓 서른을 넘겼을 때라 지금처럼 뚱뚱하지도 않았고 폼 잡는 기세도 없었습니다.어떤 고생이라도 감수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습니다.그는 방직품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 같았지만 무척 총명했으며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빨리 숙련되었습니다.방직품은 실크와는 기술표준과 품질기준이 다릅니다.그는 동유럽 시장이 요구하는 데 따라 그에 맞추어 주문을 해왔습니다.
양빈은 처음에 어떤 특정한 스타일과 컬러 및 가격대들을 제시해 왔는데,나는 그때 그가 요구하는 것들 중에서 미국이나 유럽시장에서 유행이 지났지만 동유럽에서는 가장 인기가 높은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나 역시 미국과 유럽 수출품중에서 재고로 남은 것들을 적극적으로 추천했지요.물건의 품목이 많았습니다.우리네 의류들은 본래 미국과 캐나다,유럽 등에 수출하는 것으로 계절과 유행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해야 했습니다.그쪽에서 크레임 걸린 물건들이 동유럽 시장으로 가면 고급품으로 변해 잘 팔렸던 것입니다.클레임 걸린 물건의 가격도 비싸지 않아서 양빈은 싸게 구입하게 되었습니다.그는 이런 기회를 잘 잡았는데 물론 큰 돈을 벌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미국과 유럽에서 크레임 당한 물건을 다른 데로 수출하거나 국내시장에서 소화해 보려고 할 때 양빈은 기꺼이 다 사갔습니다.우리는 많이 공급하기를 원했습니다.90년대 중반에서 미국,유럽 시장 위주로 수출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동유럽 시장에 대해 잘 알지 못했습니다.양빈은 동유럽을 잘 알고 있었기때문에 그 장점을 살려 큰 돈을 번 것입니다.”
양빈은 처음에 장쑤성 일대에서 의류와 일용품들을 사들여 폴란드에 가져다 팔았다.양빈은 폴란드에서 처음에 어떻게 사업을 이끌어갔는지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 무렵 장쑤성에서 T셔츠 한벌에 중국돈 5위안에 사서는 폴란드에 가서 4.5달러를 받았습니다.제가 새벽 4시쯤 매대에 상품들을 진열하면서 상자마다 들어있는 물건들을 꼼꼼히 검사하고 난 다음에 샘플을 걸었죠.그러면 상점 문이 열리자마자 제 물건이 날개 돋힌 듯이 가장 잘 팔려 나갔어요.”
전장수성 방직품 수출회사 사장 류지옌
양빈의 사업은 점점 번창해갔다.그는 중국의 생활용품,완구,면직물,실크류들을 동유럽과 독립국가연합체 국가로 계속해서 운반해 갔다.불과 2년 동안 그의 총자산은 2천만 달러에 이르게 됐으며 네덜란드에서 ‘네덜란드유라시아’회사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그가 최초로 캔 금노다지다.바로 1994년 말에서 1995년 초쯤의 일이었다.양빈이 ‘홍콩상보’기자 쉬쉰(徐迅)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쉬쉰:다시 한번 여쭙겠는데요,폴란드에서 캔 첫 금노다지인2천만 달러를 당신은 어떻게 벌었지요?
양빈:나는 기회를 창조하였습니다.그러나 늙은 할머니라도 다 아는 기회라면 그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죠.저는 역사적인 기회를 찾았습니다.많은 사람들이 내가 왜 폴란드로 갔는지 이해하지 못했어요.그러나 당시 나에게는 몇만 달러밖에 없었습니다.적은 자본금으로 서방사회에 가서 발전을 도모하기는 불가능한 일입니다.폴란드의 개방은 나로 하여금 의류,경공업품을 전매하여 2천만 달러를 벌게 하였습니다.사실은 4천만 달러는 벌수 있었지만 그때 나는 이미 안 되곘다는 것을 내다보았습니다.그래서 그만둬야 되겠다고 생각했죠.하지만 2천만 달러를 더 벌수도 있었는데 손을 떼자니 미련이 생기더군요.그런데 만약 당시 제가 계속했으면 빈털터리가 될 뻔 했습니다.그러므로 사업가란 버릴 건 미련없이 버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양빈은 그의 예리한 눈으로 기회를 포착했다.그는 ‘기회를 잃지 마라,한 번 가면 되돌아오지 않는다(機不可失,時不再來)’는 중국 고대 명언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그는 그가 어느 자리에 서야 한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양빈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유럽을 이해했고 물론 중국은 더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그런데 경쟁은 피해야 하는 겁니다.일부러 경쟁 속으로 뛰어들 필요는 없지요.전쟁에서도 매복을 피해야 하듯이 상대방의 경쟁이 없는 지역으로 끼어 들어가는 것이지요.마치 2차대전 중에 미영 연합군이 적군의 가장 약한 지역이었던 노르망디로 상륙한 것처럼 한다면 일이 안될 법이 없죠.”
이것이 양빈의 첫 금노다지 수확에 관련된 경험담이다.
유럽에 머물고 있던 중국유학생들은 중구긔 물건을 동유럽이나 독립국가연합체,러시아로 가져와 파는 것으로 돈을 벌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중국의 많은 개인사업자들도 이 행렬에 참여했다.그래서 사람들은 이들을 ‘국제 전매’대군이라고 불렀다.그라자 그 곳의 경쟁이 급작스레 치열해졌다.
양빈은 일찌감치 이 사업을 오래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그는 이미 다른 사업으로 옮겨가는 전략을 짜고 있었다.
중국 현대농업으로의 진군
동유럽 무역을 그만 두기로 결단을 내린 양빈은 네덜란드로 돌아와 자신의 모든 정력을 사업 기회를 찾는데 투입했다.그러나 반박자 늦는 바람에 그는 자본금도 반으로 줄어들어 버렸다.
양빈이 네덜란드로 돌아왔을 때 IT는 대만사람을 따라잡을 수 없고 부동산업은 네덜란드 사람들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는 네덜란드에 대한 사회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양빈은 네덜란드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다.풍차와 제방으로 유명한 나라,유럽의 서부에 위치해 있으며 장쑤성의 5분의2밖에 되지 않는 나라,인구는 베이징과 거의 비슷해 1,600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는 세계 7대 무역국가인 선진국이었다.1인당 GNP는 2만5천 달러로 세계 10위권안에 들고 있었다.게다가 미국 다음의 농산물 수출국가로 ‘유럽의 야채바구니’라는 별명을 얻고 있었다.유럽공동체 사람들이 먹는 야채의 73%가 네덜란드에서 공급되고 있었다.
네덜란드의 토지는 2백만 헥타르인데 그 절반은 목장으로 젖소를 양식하고 있고 젖소 150만 마리가 우유 110억 킬로그램을 생산하고 있었다.네덜란드는 또 세계 최대의 닭고기와 계란 수출국가이며,세계 화훼무역액의 67%를 차지하고 있었다.네덜란드 사람의 1인당 평균 농업수출률은 세계1위이며 1인당 연평균 농업 수출 매상고는 48.691달러다.네덜란드의 유리온실 면적은 11,000헥타르로 세계 전체 온실면적의 4분의 1이상을 차지하는 등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네덜란드의 토지자원과 자연조건은 그렇게 좋은 편이 못되나 세게적인 현대 농업대국을 이뤄냈다.고도로 발전된 현대 설비 농업과 고효율 농업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고 있었다.
양빈은 네덜란드 주재 중국외교관을 많이 알고 있었다.그들은 모두 네덜란드 농업모델을 중국에 끌어들여야 한다고 양빈을 격려했다.양빈 또한 이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양빈은 네덜란드의 성공 비결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기 시작했다.그는 모든 이름난 야채,화훼 회사에 한주일씩 머물면서 관찰한 결과 마침내 두 가지를 발견했다.첫째,사람들은 온실 없이는 네덜란드의 농업 현대화를 생각할 수 없다고 자랑하고 있다.둘쨰,냉장 없이는 세계 화훼,채소 무역의 70%시장을 차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네덜란드 사람들은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다.
그는 한편으로 중국의 개혁개방 발전과정에서 어떻게 중국 농업을 현대화할 것인가에 대해 연구했다.중국이 농촌에서 ‘도급(聯産承包)’제도를 실시해 농민들이 밥을 배불리 먹고 부유해지기 시작했으며 연평균 수입은 중국돈 1천 위안까지 오르게 됐지만 아직도 하늘을 믿고 농사를 지어야 했고,뼈빠지게 일해야 돈을 벌수 있는 지경에 머룰러 있었다.이는 여전히 농업문명시대의 사고방식과 관리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소농경제에 머무르고 있는것이었다.
쉽게 말하면 중국은 기본적으로 원시농업상태에 머물고 있었지만 네덜란드는 이미 현대 공장화 농업에 진입해 있었다.그래서 네덜란드 일반 농민의 연평균 수입은 25만 달러에 이르고 있었다.이것이야말로 현대농업과 원시농업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에 양빈은 크게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는 대뜸 중국 농민의 처지를 생각하게 되었다.가지고 있는 토지는 크게 다를 바 없지만 생활수준은 한 마디로 말해서 찬양지차라고 할수 있다.그에게는 한 가지 비전이 생겼다.네덜란드 농업을 중국 농업에 끌어 들여서 중국 농민들도 네덜란드 농민처럼 잘 살 수 있게 하는 것,이것이 바로 그의 목표였다.그는 예리한 눈으로 중국의 하이테크농업에 투자할 만한 기회가 있음을 보았다.
1996년 양빈은 농업에 투자하기로 결정하고 네덜란드 농업모델을 중국에 가지고 들어오기로 했다.그때 유럽에 있던 중국인 친구들은 모두 그의 결정에 의아해 했다.왜 양빈은 하필 중국으로 돌아가서 농민 노릇을 하는가?그때 유럽에 살던 100만 화교 중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그들은 모두 유럽에서 선진적인 기계업,컴퓨터업이나 화공산품 사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양빈은 진지하게 해보고자 하는 일이면 꼭 해나가는 사람이다.그는 화훼 시장과 녹색농업 분야를 정확히 보아냈다.그는 국내 유명 도시의 큰 무역도매시장에 파고 들어 그 수요와 공급 사정을 파악했다.중국 사람들은 화초를 무척 좋아해서 화훼도매시장이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그는 차츰 전국 각지의 화훼들이 대부분 온실에서 재배된다는 것과 그 온실 설비는 아주 허술하다는 것을 발견했다.사업자들은 하루 빨리 설비를 들여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그는 개혁개방 후 중국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신속하게 성장한 상황에 흥분했으며 이런 정보는 그가 중국 농업에 투자하겠다는 결심을 하게끔 하였다.
1996년 말부터 1997년 초까지 그는 자본 운영을 통해 네덜란드에서 2개 회사를 사들였는데 그 중 하나는 70년 역사를 지닌 온실기업이었고 다른 하나는 냉장회사였다.결국 그 두 회사가 네덜란드 농업을 중국에 끌여들이는 기반이 되었다.그는 두 회사를 모두 그가 독자적으로 경영하는 네덜란드 유라시아그룹에 소속시켰다.그리고 총본부는 네덜란드 라이든시에 두었다.
그는 베이징,상하이,다롄,광저우,청두 등 지방에 있는 도매상들과 공급계약을 체결하고 스스로 밤을 새워 네덜란드로 돌아가 수출화물을 선적했다.며칠후 1천만 달러의 네덜란드 화훼와 모중,종자가 속속 고객의 손으로 들어가 불티나게 팔렸다.
1997년 말,양빈은 베이징에서 네덜란드 유라시아그룹의 이름으로 푸청먼와이(阜城門外)완퉁(萬通)빌딩 신세기광장 10층에 3칸짜리 사무실을 빌려 그의 네덜란드 농업모델 수입구상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가장 일찍 입사한 원로 공신이자 지금의 선양 유라시아그룹의 부총재인 리강(李剛)이 베이징 창업시절의 양빈에 대해 이렇게 회고하였다.
“1997년 말,베이징에서 한 친구의 소개로 양빈을 알게 되였습니다.그때 그는 창업 단계로 단순한 무역업,합작투자에서 산업화투자단계로 옮겨가는 중이였습니다.
나는 초기 회사의 이미지 기획을 맡았다가 나중에는 사무실 관리와 아이템 개발을 책임지게 되였습니다.”
“1998년3월 내가 양빈과 함께 시안(西安),스자좡(石家莊),산동(山東),선양,다롄,장춘
(長春),주하이(珠海) 등지를 다니며 많은 아이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중요 아이템은 산업화 생산기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4월에 베이징 라이타이(萊太)화훼시장이 준공됐습니다.그것은 베이징 차오양구(朝陽區)태양궁과 양빈이 합작한 것으로 대형 화훼전시장과 도매시장이었습니다.5월에 우리는 각지에서 합작아이템의 초기 논증과 계획,사업가능성과 발전방향,지리적 위치,해당지역 정부의 지지 정책,실력 등에 관한 조사하고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양빈의 베이징 창업 초기 또 다른 원로 공신이며 현 선양 유라시아그룹의 부총재인 스쥔(石軍)이 당시의 서정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1998년 4월15일에 입사했습니다. 당시 중국 각 성에서는 현대화 하이테크 농업시범구역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유라시아그룹은 네덜란드 화훼 ,종자,모종,온실설
비를 팔면서 고객들에게 기술지도와 설비안장 등을 실시하고 있어 가장 빠른 때였습니다.
그떄는 업무와 아이템에 관해 상담하러 오는 사람들이 줄을 이루고 있어 일이 많았던 시절이었습니다.”
“1998년 3월초, 우홍구인민정부는 료녕빌딩에서 우홍구 현대농업 투자유치회의를 진행하였어요.양신화 부성장이 회의에 참석하였어요. 회의에서 심양시 농촌경제발전국 국장,당조직서기 위버가우홍구에서 현대화 농업현대화 발전 하려고 한다고 하니 양신화부성장은 성에서 현재 대형현대화농업항목을 유치중이라고 얘기하였어요. 위버가’우리 우흥구에 유치할수 있는지요?’하니 양신화부성장은’그것은 외국상인의 의견을 보아야 한다’ 고 하였어요.”
“4월18일에 라이타이 화웨시장이 문을 열었습니다.내가 입사한 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습니다.개업식은 대단한 성황을 이루었으며 고객들은 중국 각지에서 몰려 왔습니다.
1998년5월말, 양빈씨는 초청에 의하여 심양으로 갔습니다. 양신화부성장、심양시 리보전부시장、 시농촌경제발전국 위버국장과 함께 우홍구 북령향 소한촌현장에 가서 토지를 보고 양빈은 투자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위버는 성. 시 령도의 지시에 따라 우홍구 각 정부관련부문에 네덜란드촌 건설위한 복무를 잘하고 적극적으로 해당서류와 절차상 진행협조하고 우홍구할수 있는 범위에서 네덜란드촌 건설에 우수하고 좋은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듣기로는 1996년부터 1997년까지 네덜란드 유라시아화훼그룹은 허베이성(河北省)산허(三河)시 임업국,장쑤성 방직품 수출공사 등 세 회사가 공동으로 네덜란드 튤립전을 열어 전국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고 합니다.그때부터 양빈은 국내 농업,화훼양식 대리상들과 아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이번 라이타이 시장이 문을 열자 옛날 고객들과 친구들이 몰려 왔습니다.그래서 이때 베이징에는 네덜란드 꽃을 파는 열풍이 불었습니다.그 전에 중국의 화훼시장은 윈난(云南)과 광둥(廣東)의 산품에 집중돼 있었습니다.라이타이 시장에서는 유럽의 고급 화훼류를 들여왔는데 모양이나 품종 모두 국내에서는 처음 보는 것들이어서 반응이 좋았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늘 토끼가 나타나지 않으면 매를 내놓지 않는 버릇이 있습니다.좋은 물건을 잘 진열해 놓으면 샘플 구실을 하게 됩니다.우수한 야채와 화훼류를 직접 판매하는 사가는 사람이 없다가도 일단 샘플을 잘 진열해 놓으면 많은 소매상들,심지어 농민들도 다투어 구매해 가게 됩니다.심지어 새로운 품종 하나를 사들이기 위해 서로 다투기까지 합니다.어느 때는 수입 물건의 품종이 많지 않고 가격이 몹시 비싸기도 합니다.어떤 종자의 경우 1킬로그램에 중국돈 6만 위안(한화약 천만원)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양빈은 네덜란드의 판매 모델과 방식을 중국에 들여왔다.화훼경매 같은 것은 중국에서 처음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유라시아그룹은 1997년 5월에 베이징 ,상하이,우한(武漢),선양,청두 등지에 14개의 지사를 설립했다.이로써 중국은 국외로부터 화훼의 우수품종을 수입하게 되었는데 해마다 20%의 빠른 속도로 끊임 없이 성장했다.중국의 화훼업협회가 낸 통계에 따르면 1990년대,중국 화훼시장에서 팔리는 네덜란드 화초에 70%가 바로 유라시아그룹이 수입한 것들이었다.
양빈은 군교에 다닐때 모든 일을 전략적으로 판단하는 방법을 배웠다.그는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정립하고 유럽을 이해하고 있었으며 중국에 관해서는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그는 네덜란드 농업모델을 중국에 가지고 오면서 자신의 상황에 대해 상세하게 분석했다.자신은 네덜란드농업의 5가지 중심고리 중 시장,온실기술,냉장운반,과학관리,등 4가지를 장악하고 있다.반면 자본력이 부족하다.그러므로 든든한 돈줄이 있어야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중국 농업에 두 가지 분야를 가지고 들어왔다.그 한 분야는 화훼무역시장을 개척하는 일이었고 또 한 분야는 온실설비무역에 관련된 하이테크농업을 끌어들이는 것이였다.
중국에서 개혁개방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에 따라 더 많은 기업들이 현대농업분야로 개입하게 되었다.중국의 많은 성과 도시에서도 하이테크농업을 실현하기 위해 서두르고 있었다.이는 온실설비에 관련된 수요의 수직상승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었다.그들은 모두 네덜란드로 눈을 쏠리었다.양빈은 온실설비의 가격을 낮추는 전략으로 기타 네덜란드 온실설비 생산업자와 영업자들을 이겨냈다.그는 그 일을 두고 ‘벤츠와 샤리(중국차)의 대결’이라고 불렀다.
“네덜란드산 온실설비 가격은 거의 우리 것보다 배가 높았습니다.그들은 중국 농민이 부담할 수 없는 가격을 부르고 있었습니다.물론 당시 그 물건들은 우리 것보다 품질이 좋았습니다.그러나 당시의 중국 농촌에서는 샤리 정도의 상품으로도 충분했습니다.벤츠 아주 사치스러운 물건이었죠.중국시장을 이해했던 제가 한판 이긴 것이에요.”
이처름 양빈은 이 대결에서 중국 온실실비시장 총액의 90%를 차지할 수 있었다.양빈은 중국 현대화 농업에 첫 발을 내딛고,비록 무역에 제한된 일이지만 수천만 달러의 이익을 창출했으며 거기에 동유럽 의류뮤역의 이익을 합해서 그 당시 재산이 이미 1억달러를 넘고 있었다.그는 이미 베이징 라이타이 화훼시장에 투자해서 아주 많은 이익을 얻기도 했다.그는 이미 든든한 자금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중국에 네덜란드 농업모델을 펼쳐나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