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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훔친

제6장 양빈과 필자의 평양방문

양빈 평양행을 제의하다.
2002년4월15일 저녁 필자가 15만자의 ‘대부천하’(大富天下)를 완성했을 떄의 일이다.후기까지 쓰고 나서야 나는 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그때 나의 핸드폰이 울렸다.선양 네덜란드촌 총재 사무실의 류뎬후이(劉殿輝)가 걸어온 전화엿다.
“양총재님이 통화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곧바로 핸드폰에서 양빈의 열정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관선생님,어디 계십니까?”
“베이징 집입니다.”하고 나는 대답했다.
양빈은 “관선생님,제가 책 한권 써달라고 부탁해도 될까요?”하고 말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의 말에 나는 더듬거리며 “뭘 쓰라는 겁니까?”라고 되물었다
양빈이 큰 소리로 말했다. “제 전기를 써주십시오.선생님이 저에 관해서 쓴 문장을 읽어 보았습니다.기자들이 쓴 것보다 훌륭합니다.선생님은 유명한 작가이니까요.필요한 것은 모두 제가 드리겠습니다.가능하시면 즉시 네덜란드촌으로 오셨으면 하는데요.”
“왜 이렇게 급하십니까?”
양빈은 내 물음에도 대답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평양에 가보신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폐쇄국가가 아닙니까?일반 사람들은 못갈 걸요.”
내가 마음 속 말을 했다.
전화에서 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여권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알았습니다.사진 몇 장을 가지고 내일모레쯤 선양으로 오십시요.저와 함께 평양
으로 갑시다.”
“정말입니까?”
내가 의아해 하며 물었다.
“그럼요.”
“… …”
“하루이틀 내로 선양으로 오십시요.우리 함께 가시지요.”
나는 정말 알 수가 없었다.그는 왜 나를 북한의 평양으로 데려가려고 할까?비록 3월6일 저녁에 그가 다음 날 팀을 이끌고 신의주로 가서 비행장과 항구를 조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그저 건설공정에 관한 일이었을 뿐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북한에 관해서는 모두들 폐쇄적인 신비로운 국가라는 것을 많이 들어서 잘 알고 있다.저명한 기업가 쑹차오디(宋朝弟)가 일찍이 이런 제안을 햇다. ‘학습의 혁명’이라는 책을 출판한 다음 사람들을 조직하여 북한 현황에 관련된 책을 내자는 것이엇다.그는 나더러 원고를 책임지라 하고 출판은 그 자신이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북한 현황과 인민생활에 관련된 기사가 너무 적어서 베이징의 신화사 본부에서는 북한주재 기자가 쓴 기사 2편을 찾아낼 수 있을 뿐이었다.북한 현황을 소개하는 책을 편집하자는 아이디어 자체는 좋지만 무능한 나로서는 쑹차오디의 제안과 배려에 완곡한 사절을 표하는 수 밖에 없었다.이 일이 있은 후로부터는 1년밖에 안 되는데 양빈이 나를 북한방문단에 초청한 것이다.찾을 대는 없더니 생기려니 너무 쉽게 생긴다는 말이 맞앗다.
나는 평양에 도착한 다음 많은 공장을 참관하고 ,간부와 시민들을 방문하겠다고 결심했다.또한 녹음기,카메라,수십 통이 필름,노트와 싸인용 펜 몇개를 준비했다.특히 내가 빼놓을수 없는 중화담배 2보루,스리파이브 담재 2보루를 준비했다.
4월16일,나는 베이징에서 11호 특급열차를 타고 떠났다.선양역에 도착했을 떄는 이미 황혼무렵이었다.역에는 네덜란드촌의 겅웨이웨이(耿薇薇)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들은 벤츠에 나를 태워 네덜란드촌으로 갔다.나는 별장 D3호에 묵었다.2층짜리 네덜란드식 건물로 응접실에는 네덜란드 꽃과 과일이 놓여져 있었다
손님이 집에 온 것처럼 느끼게 하는 이런 대접은 나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내가 막 짐을 풀었을 떄,네덜란드촌 접대 사무실 저우샹 주임이 친히 나를 찾아왔다.3월6일 처음으로 네덜란드촌을 방문했을떄.그가 줄곧 나를 안내했다.친구를 만나니 무척 기분이 좋앗고 그도 나처럼 좋아하며 밥상에서 서로 술 담배를 권하고 회포를 풀었다.
저우샹은 양빈이 팀을 인솔하여 평양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여권이 있는 사람들을 그을 따라 전세기를 타고 갈 것이며,여권이 없는 사람들은 도강증(渡江證)을 가지고 평양으로 간다고 말했다.단둥시에서 압록강을 건너는 임시 통행증을 만들어 신의주로 간후 평양까지 승용차로 이동해서 양빈과 합류한다는 것이다.
나는 사진을 저우샹에게 건네주었다.그는 다음 날 사람을 보내서 단둥에서 도강증 수속을 밟는다고 햇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양빈 대표단 성원들이 전국 각지로부터 몰려왔다.그들도 네덜란드촌 별장지구에 묵게 됐다.내가 만난 적이 있던 마닝이 있었고,왕후이둥,리수,저우팡성 등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그제야 나는 양빈이 북한과 신의주 특구 건설분비에 관련된 대규모 회담을 할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북한 입국시 신의주 세관에서 있었던 일

4월21일 아침 8시,네덜란드촌 총재 사무실의 왕치(王琦)양이 나와 양다융 변호사,추이양 변호사를 대동하여 함께 기차를 탔다.선양에서 출발해 점심에 단둥에 도착했다.1980년대로부터 1990년대 초까지 나는 단둥을 두 차례 방문한 적이 있었다
단둥은 청산녹수에 둘러싸인 변경의 작은 도시었다.나는 괜찮은 인상을 받았다.봉황공원과 압록강변의 공원이 아름다웠고 강변에서 건너편 북한땅 신의주를 바라보는 것은 특별한 느낌이었다.
나와 왕치,양다융,추이양은 세관 옆 식당에서 서둘러 점심밥을 먹고 음료수를 사서 휴대한 채 단둥 동세관 건물로 돌아와 왕뤄와 만낫다 .왕뤄는 항구설계와 도시기획 전문가로 다롄시 항구설계원의 원장직을 맡고 있었다.그는 설계원의 승용차로 다롄에서 직접 단둥까지 온 것이다.나는 3월6일 네덜란드촌에서 있었던 연회석상에서 그와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적이 있으므로 구면인 셈이다.이번 평양길에 아는 사람과 동행하게 되었으니 무척 기쁜 심정이었다.
나와 왕뤄,왕치,양다융 및 추이양은 모두 도강증을 이용했다.우리 몇 사람은 단둥 국제화물운송유한회사의 이름으로 도강증을 받은 것이다.나의 도강증에 적힌 직함은 사장이었다.오후 1시,운송회사가 승용차로 우리를 압록강대교를 지나 북한 신의주 세관까지 데려다 주었다.말이 세관이지 한 울안에 아주 작은 단층건물이 한 줄 늘어선 데 불과했다.내가 1980-1990년대에 국경을 넘기 위해 자주 이용하던 선전 뤄후 세관건물과 홍콩 라호 세관건물과는 아주 딴 판이었다.
북한측에서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파견한 외무성 관리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우리 몇 사람은 작은 세관 건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좁은 집안은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어떤 사람은 줄을 서서 수속을 밟고 있었으며,어떤 사람들은 검사를 받고 있었다.우리는 오래된 소파가 비어 있어서 그곳에 앉아 휴식하며 조급한 마음으로 기다렸다.내가 앉은 소파 옆에 테이블이 있었고,뒤쪽에 50세 가량된 인민군 소령 한 분이 앉아 있었다.나는 주머니에서 주와표 담배를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였다
소령이 친근한 눈길로 나를 눈여겨 보므로 나는 공손히 한 대를 권했다.그는 담배를 받고 엄지 손가락을 내보이며 좋은 담배라고 표시를 했다.나도 중화담배를 가리키며 ‘좋습니다’라고 북한말을 한 마디 했다.그랬더니 소령은 주름 가득한 얼굴을 펴고 웃음을 띠면서 역시 ‘좋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소령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그저 자기보다 계급이 낮은 두 군인이 검사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나는 짐에서 스리파이브표 담배를 꺼내 소령에게 피우라고 주면 담배라고 말했다.소령은 기쁘게 담배를 받으며 “고맙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기뻐서 또 한마디 북한말로 “반갑습니다.”라고 했다.
인민군 소령은 갑자기 중국말을 하였다. “당신은 우리 조선말을 할 줄 아누만요!”
나는 미안한 듯이 “몇 마디뿐이요,몇 마디 뿐이요.”라고 말했다.
일찍이 1960년대 초반에 나는 백두산 지역으로 하방당했다.그떄 류허현(柳河縣)의 우다오거우(五道溝)의 다취안옌(大泉眼), 산위안푸(三元堡),안커우전(安口鎭)일대에는 많은 조선족이 집거해 사는 공사(公社)와 대대(大隊)가 있었다.그때 시골에 시찰내려가면 조선족 집을 돌아가면서 먹고 잤다.한 끼에 돈 10전만 내면 그뿐이다.
무엇을 먹더라도 그만한 양만 주기로 돼 있었다.미안할 떄가 있지만 양표와 돈을 더 드릴 수 없었다.규칙 위반이기 때문이다.그럴 때는 베이징에서 가지고 온 이과두(二鍋頭)술을 조선족들에게 나누어 주곤 하였다.그러므로 많은 조선족 친구를 사귈수 있었다.
나는 류허현 현성에서 문학을 좋아하는 조선족 학생 남영전(南永前)을 제자로 받아들였다.나중에 그는 시인이 되었으며 듣자니 조선족으로서는 유일한 대형문학지 ‘장백산’의 사장이 되었다고 한다.그때 조선족 친구들에게 조선족의 일상용어와 노래를 배울수 있었는데,40년이 지난 지금 북한 땅을 밟으며 몇 마디 북한말이 튕겨나온 것이다.
인민군 소령은 기뻐서 담배를 피우며 조선민요도 가볍게 흥얼거렸다.
나는 참지 못하고 작은 목소리로 따라 불렀다.1950-60년대에 유행하던 ‘반달’과 ‘뻐꾹새’노래였다.그러자 소령은 나를 더욱 특별하게 대해주며 내 팔을 치고는 “좋습니다,좋습니다”라고 했다.
검사를 하고 있던 두 명의 군인도 나에게 웃어보엿다.
그때 평양에서 온 무역성 통역담당 박성호가 신의주 세관 변방 검사소에 도착했다.그는 우리가 검사를 마친 후 바로 건너갈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떄 뜻밖의 일이 생겼다.젊은 여자 변호사인 추이양이 옆방에서 여성 군인으로부터 검사를 받다가 배낭 속에 들어있던 몇 장의 디스켓이 발각된 것이다.여성 군인은 집요하게 컴퓨터에 넣고 검사를 하려고 했지만 추이양은 절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그는 문을 열고 “양다융!”하고 불렀다.
밖에 있던 양다융 변호사가 들어가 원인을 물어보고 여성 군인에게 일러주었다. “이것이 비밀문서입니다.절대 검사할 수 없습니다.”
여성 군인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여기는 변방 검사소입니다.우리는 세관을 통과하는 어떤 사람과 어떤 물건도 검사할 권리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집요하게 디스켓을 컴퓨터에 넣으려고 했다.양다융은 조급한 나머지 항의를 표시했다. “내 말을 들어요.디스켓을 열었다가 정치적인 책임을 질 수 있습니까?당신뿐만 아니라 당신네 소장,신의주의 당비서도 감히 열지 못할 것입니다.이것이 당신네 중앙의 비밀 문서입니다.”
우리는 문밖에서 그들의 다투는 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났다.중국측 대표 한 사람이 평양에서 온 외무성 관리와 통역해 재빨리 찾았다.
북한 외무성 경제국 김부국장은 전번에 북한측 대표로 선양의 네덜란드촌에서 있었던 첫 담판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양다융이 그를 알아보고 이 디스켓에 든 것이 신의주 담판용 법률문서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외무성 김부국장은 신의주 특구에 관한 사정은 군인이건 신의주 지방이던 간에 극도의 비밀에 붙여야 하므로 변방부대의 군인이 열어보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여성 군인에게 “이건 비밀문서입니다.당신들이 열 수 없습니다.이대로 보내줄 수 없을까요?”라고 했다.그러나 여성 군인은 좀처럼 동의하지 않았다.반드시 평양 본부의 전화가 있어야 가능하다고 했다.
외무성 관리는 평양에 전화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한 시간 남짓이 지났을 때 변방 검사소의 군인이 와서 “평양에서 전화가 왔습니다.보내주랍니다.그러나 반드시 디스켓을 봉해서 조선 관리가 가지고 평양까지 간 후에 다시 돌려 드려야 합니다.”라고 말했다.소동은 이렇게 가라않았다.우리 남자들은 엑스레이 검사를 받아야 했다.소령이 나를 보더니 어꺠를 두드리며 “가세요”라고 했다.덕분에 우리는 엑스레이 검사를 받지 않고 무사 통관되어 승용차에 올라탔다.
우리는 평양에서 온 관리들 덕분에 검사를 철저히 받지 않고 트렁크에 넣은 핸드폰을 소지한 채 넘어갈 수 있었다.트렁크를 열었지만 검사원은 보는 흉내만 내고 통과시켰다.핸드폰은 옷 밑에 있었기 때문에 발견되지 않았다.뒤에 안 일이지만 핸드폰은 소거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평양은 위성통신 설비가 없기 때문이다.평양에 있는 동안 핸드폰으로 국내의 친구들과 통화할 수 없었다.


평양 가는 길의 풍경

우리는 평양에서 보내온 두 대의 버스를 타고 신의주 세관을 떠났다.세관 마당 뒤에는 차가 드나들 수 있는 한 갈래의 통로가 있었다.마당을 나와 버스가 남쪽으로 나가면 북신의주을 통과하여 남신의주에 도착하는 것이다.길 사정은 좋지 않아 벤츠 차도 40마일밖에 달릴 수 없었고 무척 덜컹거렸다.남신의주를 빠져 나온후 통행증을 검사하는 인민군이 차를 가로 막았다.평양에서 온 관리와 버스 기사 옆에 않아 있던 ‘안내원’이 함게 차에서 내려 수속을 밟은 다음 차는 계속 앞으로 달렸다.길은 더 사납고 덜컹거리는 정도는 더 심해졌다.심지어 우리들의 머리가 차의 천정까지 닿을 떄도 있었다.나는 긴장해서 차 안의 손잡이를 잡고 몸이 튀지 않도록 애썼다.
다행히 버스 밖의 들판이 일행의 눈을 끌었다.길 옆의 나무가지 들은 이미 푸른 빛을 띠고 있었고 밭에는 농민들이 소를 몰며 논을 갈고 있었다.논갈이 계절이 벌써 돌아온 것이다.멀리 바라보이는 마을은 북한식 흰색 집들로 이루어졌다.어쩌다 구식의 가스 69차가 지나가는데 차 뒤에는 화물이 실려 있는 것이 아니라 공짜로 타는 가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노동자,농민,군인들이 함께 엉킨 채 덜컹거리며 옆으로 지나갔다.가스 69차의 배기통에서는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아마도 디젤유를 연료로 쓰고 모양이다.
나는 기분이 몹시 좋았다.북한 농촌의 진실한 모습을 보면서 조선노래 한 곡을 가볍게 불러댔다.
푸른 산 기슭 기름진 들가
버드나무 한 그루 비껴 선 곳에
정가로운 우물 있어 맑은 샘 손나니
여기는 내 고향 사랑하는 내 조국 ……
옆에 앉은 왕뤄는 비웃는 표정이였다,그는 아마 이 영감이 차를 타고 오느라 힘겨울텐데 노래를 부르다니,젊기도 젊었네라고 생각했을것다.추이양도 웃으며 물었다
“관선생님,조선노래를 부르는거예요?”
내가 대답했다
“그래요,50년대에 배웠던 곡이죠.”
장난기가 있는 양변호사는 웃는 눈으로 이렇게 말했다.
“어르신님,조선노래를 우리에게 몇 곡 더 들려주세요.우리도 귀에 익혀야지요.”
여러 사람들에게 떠 받들려 나는 ‘김일성장군의 노래’, ‘꽃파는 처녀’, ‘뻐꾹새’ 등을 불렀다.버스 기사와 안내원도 아는 곡을 듣자 계속해서 고개를 돌리고 우리를 향해 웃어주었다.
나는 단둥에서 가지고 온 광천수와 담배를 북한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며 같이 피우고 마셨다.
차가 오봉리를 거쳐 정주로 달리더니 곧 청천강을 지나 평안남도 신안주에 들어섰다.도중에 신의주-평양 철도가 가끔 나타나는데 달리는 기차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아마도 에네지 부족으로 열차운행 회수가 줄어든 모양이었다.나는 유리창 밖으로 나무가 점점 많아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신의주를 출발했을 떄 봤던 민둥산 풍경과는 아주 달랐다.묘향산 지역으로 들어가면서 차는 힘들게 산길을 가고 있었다.숙천과 석암리를 지나면 평양시관할구역으로 들어서게 된다.
앞에 가던 왕치와 북한 외무성 관리가 탄 붉은 색 벤츠가 보이지않았다.우리는 내려서 잠깐 휴식하고 다시 떠났는데 자동차가 덜컹거리지 않았다.속도가 빨라지면서 양옆의 산봉우리들이 휙휙 지나갔다.자동차가 고속도로로 들어선 것이었다.50킬로미터의 이 구간은 평양시와 연결되는 현대식 고속도로였다.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하면서 차가 평양시내로 들어섰다.평양은 이미 등불이 켜지기 시작했고 고층 건물이 즐비하였다.온도시가 등빛으로 휘황했으며 평양에 처음 오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하게 하였다.차가 개선문을 지나서 대동강을 따라 가다가 현대식 빌딩이 문 앞에 도착했다.이곳이 바로 유명한 양각도(羊角島)호텔이다.우리는 각자 짐을 들고 고비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모두 외국인들뿐이었고 중국 군복을 입은 젊은 남녀들도 보였다.
그들은 중국인민해방군 총정치부 문공단의 배우들로 북한군 건군기념 축제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양각도호텔에는 북한의 외무성,무역성 관리외에도 먼저 도착한 왕치와 우리의 접대를 책임진 평양――유라시아 합영회사 거셴민(葛憲民)사장,왕위
민(王玉民)부사장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거셴민,왕위민은 양각도호텔 지하1층의 중국요리집에서 우리들을 위해 연회베풀어 주었다.양각도호텔 지하1층은 마카오오락회사가 맡아 경영하고 있는데,그 안에는 중국요리점과 디스코흘,사우나와 소형 도박장이 있었다.
중국 요리점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몇십 명은 들어갈수 있었다. 나는 그곳 술값과 음식값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달러로 계산하고 있었기 떄문에 중국돈과 달러 환율에 비추어 가격을 상상해봤다.하이네 맥주 작은 병 하나에 국내의 슈퍼마켓에서 라면 5~6위안 할것인데 여기에는 우대가격이라며 3달러를 받고 있었다.중국 돈으로 25위안이었다.나중에 양빈을 따라 소형 도박장과 디스코홀에 가보았다.디스코홀 안에서는 하이네 맥주 작은병하나에 5달러 받고 있었다.중국돈 40위안가량이다.양각도호텔
의 요금기준은 베이징의 어느 5성급 일류호텔 못지 않았다.
우리는 양각도호텔에 자리를 잡았다.첫날 밤은 아무일 없이 지나갔다.


양빈이 전세기를 타고 평양에 도착하다.
4월22일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 시계를 보았다. 베이징 시간 6시30분,평양시간 7시30분 이었다.커튼을 걷고 밖을 바라보았다.여러가지 건축풍격의 빌딩이 푸른 나무가지 사이로 보였다.평양이 녹화를 매우 중요한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나는 아래를 내려다 보고서야 이 건물이 작은 섬 위에 지여서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북한 통역 박성호의 말을 듣고 알게 되었는데,이 작은섬이 양뿔 모양처럼 생겼기에 양각도(羊角島)라 부른다고 했다.그래서 이 섬에 지은 현대식 호텔의 이름을 양각도호텔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북한식과 서양식을 결합한 이침을 먹고 호텔 로비에 모여 다시 차를 탔다.긴 자동차 대열(이때 많은 북한 관리들과 유라시아――평양 합영회사의 거셴민,왕위민등도 타고 있었다)은 시중심지를 지나 평양공항
으로 달렸다.
평양 시간으로 10시에 도착해야 하는 양빈의 전세기는 선양 도선공항에
서 연발이 되어 우리는 하는수 없이 공항의 귀빈실에서 참고 기다려야 했다.
이때,북한정부의 관리들이 귀빈실까지 찾아와 우리들을 만났다.60세 가까운 신체가 매우 건강한 분이 바로 북한 원예총사 김동규 총사장임을 소개를 통해 알게 되였다.그리고 외무성,대외경제합력추진위원회의 관리들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얼마 전에 선양 네덜란드촌에 북한 대표단 성원으로 왔던 분들이었다.
그때 양빈의 전세기가 평양시간으로 12시에 도착한다는 연락이 왔다.시
계를 보니 아직 1시간 정도 남아 있었으므로 2층 로비에 구경을 갔다.
그곳 상품 진열대에는 고객들이 살만한 많은 북한의 특산물들이 진열되어 있다.인삼,인삼술,인삼사탕,담배,컬러인형,서예작품,그림 등이 있었다.그 외에도 양주,양담배,수입기념품들도 있었다.
어느 휴게실에 고객들을 위한 여러가지 책자와 홍보물들이 있기에 다가가 펼쳐보았다.한글,중문,영문,일어등 여러나라의 문자로 김정일장군을 소개한 책【김정일장군의 이야기】및 기타 김정일의 저작들이 있었다.그 책들은 중국 국내에서도 보기드문 책들이었다.나는 【김정일 약사】란 책을 펼쳐보았다.
내가 흥미진진하게 읽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양빈의 전세기가 금방 도착할것 이라면서 빨리 내려가자고 하였다.우리는 또다시 차를 타고 공항안으로 들어가 활주로와 50미터 떨어져있는 곳에서 정차했다.담배 한대 피울 시간이 지나 두대의 소형비행기가 제비마냥 가볍게 착륙했다.
우리 일행을 태운 승용차 대열은 양빈의 전세 비행기 여태까지 갔다.
프로펠러가 계속 돌고 있었기 때문에 바람이 무척 셌다.소형비행기의 문이 열리자 리강,마닝,양빈,리수,저우광서등이 비행기에서 내렸다.
김동규는 북한측 관리들을 데리고 마중을 나가 양빈등 여러사람과 악수를 하였다.먼저 도착한 우리들도 양빈등과 악수를 하였다.평양텔리비전 방송국과 신문사의 기자들도 앞으로 나와 촬영했다.
평양텔레비전 방송국의 기자는 우리더러 일자로 서게 하고는 단체사진을 찍었다.간단한 환영의식이 끝나고 모두들 각자 차에 올랐다.십여 대에 달하는 밴츠 대열이 위세 당당하게 평양공항을 떠나 도심으로 달렸다.나는 차마다 달린 번호판 앞에 빨간 오각별이 하나씩 있는것을 발견했다.북한
사람들이 국빈차라고 알려주었다.
평양의 큰길거리에서 여자 교통경찰들이 모두 차량들을 멈춰 세워 우리가
탄 국빈차에게 길을 양보하고 있었다.젊고 예쁘게 생긴 여경들은 흰 윗옷과 남색 치마를 받쳐 입고 지휘봉으로 아주 멋지게 차량들을 지휘하고 있었다.그들은 앞뒤,좌우로 몸을 돌리며 지휘봉을 휘두르는데 마치 무대 위의 여배우들이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이것 역시 평양거리의 아름다운 풍경 증의 하나라고 할수 있다.
2002년4월22일 12시. 양빈 일행 공항에서 출발하여 평양시내로 가는 중 (관산 촬영)
차 대열은 먼저 김일성 장군 기념비에 도착했다.우리는 차에서 내려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리강은 벌써 선양에서부터 준비해온 몇십 송이의 생화를 우리의 손에 나눠주었다.
모두들 김일성 장군 조각상에 꽃을 선사하였다.나는 수시로 몸을 지니고 다니던 카메라로 이 장면을 찍었다.
이어 차 대열은 위세 당당하게 빙빙 돌더니 대동강 연안을 따라 동쪽으로 달렸다.옥류관을 지나고 있었다.이곳은 평양에서 가장 유명한 냉면집으로 김일성 장군은 생전에 여기에 와서 냉면을 즐겼다고 한다.민족풍이 짙은 냉면집은 강변에 지어졌다.비록 2층밖에 되지 않지만 면적은 수천 평방미터에 달한다.2층에는 몇 개의 귀빈실이 있는데 방마다 매우 넓고 편안하였다,또한 베란다에서 대동강의 풍경을 감상할 수도 있었다.평양에 있는 동안 우리는 이곳에 와서 유명한 북한 냉면과 각종 밑반찬들을 맛보았다.
차는 옥류관 문앞에서 냉면을 먹으려고 줄을 서서 붐비고 있는 사람들을 지나고 모란봉공원의 아래를 지나 강변에 자리잡은 풍경이 아름다운 모랑봉호텔에 도착했다.대문 입구에는 당번을 서고 있는 인민군 병사들이 차를 향해 경례를 올렸다.우리는 그곳이 국가원수급의 손님들을 접대하는 국빈호텔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2002년 4월22일 평양공항에 도착한 양빈과 그를 마중나온 북한 수석대표 김동규


평양공항에 도착한 양빈대표단 부분 구성원이 양빈 전세기 앞에서
왼쪽으로부터 왕뤄,추이양,양다융
나는 2층에 묵게 되었는데 거실.화장실,침실로 되어 있는 스위트룸이었다.바닥은 나무로 되어있고 카펫이 깔려 있었으며 방은 비교적 컸다.거실에는 소파,탁자,큰 책상이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텔레비전도 있었다.또 큰 책장도 있는데 안에는 여러 가지 조선춤을 추고 있는 인형들이 놓여 있었다.탁자 위에는 북한의 인삼차가 있고 미니 바에는 과일과 북한산 술 그리고 약수가 들어있었다.화장실에는 북한산 치약,칫솔.비누,바디샴푸 등이 있었다.더운 물이 나오는 수도꼭지를 열자 뜨거운 물이 좔좔 흘러나왔다.24시간 더운물을 제공한다.방에는 비록 베이징 5성급 호텔처럼 현대적인 설비와 보일러,커피머이커 및 소형 가전제품과 커피,설탕,각종 빵들과 음료수 등을 갖추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공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봐야 했다.
양빈은 2층에 있었다.그의 방은 그때 외국의 국가원수급 기준의 방이었을 것이다.거실 2개,방 한 칸과 화장실 한 칸은 모두 무척 넓고 설비들도 잘 갖춰져 있었다.베란다는 매우 넓어 20여명이 함께 바람을 쐴 수 있으며 대동강을 마주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었다.거실에는 큰 사무용 책상과 걸 수 있는 전화가 있어 사람들을 부럽게 했다.
매일 저녁 식사후 끝나면 우리는 늘 양빈의 거실에 가서 그와 얘기를 나누고 넓은 베란다에 앉아 차도 마시고 상황을 토론하기도 하였다
22일 저녁,북한은 양빈 대표단 전체가 평양에 도착한 데 대하여 모란봉국빈호텔에서 환영 연회를 거행하였다.그날 밤.평양텔레비전 방송국은 양빈이 대표단을 거느리고 평양에 시찰하러 왔다는 뉴스를 방송하였다.
23일,평양에서 출판되는 ‘조선노동신문’의 1면 오른쪽 아래에서 기사를 실었으며 북한측이 양빈 대표단의 성원들과 공항에서 찍은 사진도 실었다.


양각도호텔 도박장에서의 양빈
23일 오전 11시 ,우리는 평양국가극장에 초청되어 조선인민군 가무단의 건군 70주년 경축공연에 참석하였다,이어서 오후에는 북한 국가대표 태권도 팀의 시범을 구경하였다.
저녁식사 후,원래 일정으로는 모두가 휴식을 취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개별적으로 모란봉 국빈호텔을 떠날 수는 없었다.나는 혼자 거실에 돌아와 담배를 피우면서 차를 마셨다.비록 2개 채널밖에 없고 모두 북한말로 되어 있지만 나는 켈레비전을 켰다.
처음으로 보는 북한 TV여서인지 매우 신비로웠다.
갑자기 양다융변호사가 1층에서 뛰어와 “서둘러요,어르신님.모두가 선생님만 기다리고 있습니다.양사장이 모두들 데리고 양각도로 갑니다!”라고 재촉했다.
급히 그를 따라 건물 입구에 이르니 양빈은 벌써 그의 초대형 벤츠 위에 앉아 있었다.나는 얼른 양다융을 따라 뒤에 있는 봉고차에 올라탔다.차에는 이미 둥롄파,왕뤄, 리변호사 ,왕위민 등이 앉아 있었다.
양빈의 차 대열은 모란봉국빈호텔로부터 시중심을 지나 양각도호텔에 도착했다.우리는 양빈을 따라 직접 지하 1층으로 내려갔다.이때는 북한관리들이 한 명도 없었다.알고 보니 지하 1층은 북한관리들은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는 곳이었다.나는 이후에도 양빈을 따라 평양을 두 번 갔었는데 여러차례 양빈을 동반해 이 지하 1층에서 도박을 즐기곤 하였다.하지만 북한관리들이 지하 1층에서 노는 것을 본 적은 없다.그들이 외사기율(外事紀律)를 얼마나 엄격히 지키는지 알 수 있었다.
지하 1층에는 우리가 먹었던 중화요리 식당 외에 디스코홀과 도박장 한 곳이 있었다.
양빈은 “도박장에 들어가 보았습니까?”하고 나에게 물어보았다.
나는 웃으면서 “이번이 난생 처음입니다.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모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양빈은 “나를 따라와요.운수가 어떤지 보세요”라고 하며 매우 자신있게 웃었다.
필자와 로씨아、보가리아 예술가 평양 양각도 호텔에서 함께 찰영
양빈이 자기 뒤를 따르라고 하였으므로 우리들은 여럿이 양빈을 앞세우고 같이 도박장 안으로 들어갔다.유라시아그룹 총재 사무실 왕치와 류덴후이가 이내 도박용 코인을 바꿔 왔다.붉은 색에 사각형 패쪽은 1,000달러짜리고,회색 원형은 100달러였다.그리고 10달러,5달러,1달러짜리도 있었다.
4군데 도박대에서 여러가지 도박이 행해지고 있었다,문 앞에 있던 두 테이블에서는 트럼프로 ‘21점 게임’을 하는데,이것이 바로 블랙잭이었다.가장 간단하고 판돈도 적어서 일반 관광객들이 즐겨 놀게끔 되어 있었다.양빈은 딴 돈으로 우리에게 1인당 100달러 또는 200달러씩 나누어 주었다.우리 대표들은 21점 게임에 몰려가 작은 놀이를 하였다.나도 한데 섞여 몇 차례 놀아보았는데 이기고 지고가 대체로 반반이었다.
양빈은 큰 놀이를 하는 하이로우 판에 앉아 처음에는 100달러,200달러 ,500달러씩 적은 돈 먹기를 하더니 나중에 기회가 다가왔다고 생각되자 붉은 패쪽 두개,심지어는 다섯개를 내미는 것이 었다.말하자면 2천 달러 ,5천달러인 셈이다.운수가 꽤나 좋았다.연이어 몇 번 붉은 패쪽을 먹었다.나는 줄곧 그의 뒤에 서서 지켜보았다.계속 이기자 그는 너무 기뻐 나더러 그의 옆에 앉으라고 하였다.그는 앞에는 이겨서 딴 붉은 패쪽 ,동그란 패쪽이 수북했다.
그는 붉은 코인 두 개를 나에게 주며 말했다.
“관선생님,여러분에게 나누어 주세요.일인당 200씩 말입니다.이기든 지든 각자가 알아서 노세요.”
나는 붉은 코인 두 개로 100짜리 코인 20개를 바꿔 일인당 두 개씩 나누어 주었다.사람들은 ‘21점 게임’을 즐겼다.
밤 12시가 넘어 나는 옆방의 디스코홀로 갔다,거기에는 외국배우들로 꽉 차서 즐겁게 춤을 추고 있었다.리강,왕치,왕위민 등은 소파에 앉아 맥주를 마시면서 양빈이 도박을 끝낼 때까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디스코홀의 외국인 배우들은 우리가 전날 양각도호텔에 머물 때 본 적이 있었다.그 중에는 러시아 배우도 몇명 있었는데 그들과 호텔 외환상점에서 몇 마디 나누고 사진도 함께 찍었었다.그들은 내 옆으로 와서 손을 흔들며 아는 체를 하였다.러시아,불가리아의 배우들은 중국인에게 우호적인 표정을 보이기도 했다.
외국인들은 디스코를 추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는데,춤을 추는 중국인은 한 명도 없었다.반대로 도박장 안에는 모두 중국인뿐이었다.심지어 총정치부 문공단이 연예인들과 연출회사 사람들도 와서 놀고 있었다.자정 넘어 새벽1시가 되어 오고 있었다.다시 도박장으로 가서 일행들의 운수가 어떤지 살펴보았다.
양빈이 다가와서 말했다.
“관선생님,제가 노는 것을 지켜보세요.”
블랙잭 도박대의 여섯명은 모두 양빈 대표단 사람들이었다.그들의 코인은 모두 양빈이 준 200달러짜리로 바꾼 것이다.그들은 처음으로 이런곳에 왔으므로 5달러짜리,10달러짜리를 걸고 있었다.양빈은 앉자마자 천 달러짜리 붉은 코인 세 개를 판돈에 깔았다.
“터졌다,터졌다.”
17점을 손에 쥔 양빈은 16점의 딜러가 숫자가 큰 카드를 쥐는 바람에 21점이 넘어가 버리자 이렇게 외치며 기쁜 나머지 자리에서 떨쳐 일어났다.건 돈이 2배를 번 것이다.그는 빙글 몸을 돌렸는데 미끄러웠는지 바로 서지 못하고 거의 넘어질 뻔 했다.추이변호사와 왕뤄가 그를 부축하고 옆 사람들이 끌어당겨서야 바로 일어섰다.그는 큰 소리로 “고맙습니다.가시죠,돌아가시죠.”라고 말했다.양빈은 그때 완전히 자신이 신분을 잊어버린 듯 장난꾸러기 어린이처럼 놀았다,
그날 저녁 양빈은 크게 이겨 2만 달러의 현찰을 바꿔 가졌다.나는 그에게서 받은 2백 달러짜리 코인을 현찰로 바꿔 로비에서 120달러짜리 ‘김일성 회고록’한 세트를 샀다.그리고 북한 우표책 한 권도 샀다.소득이 큰 셈이었다.

김정일이 양빈 대표단을 두 차례 부른다
2002년 4월 25일은 북한군 건군 70주년 기념일이었다.평양김일성광장에서는 성대한 열병식이 거행되었다.적위대와 육해공군 및 사관학교 학생들이 행진하고 있었다.
우리는 행사에 참가하라는 통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김장군께서 초대하신 것입니다.”라고 통지도 받았다.
아침을 먹고 나서 사람들은 모두 양복으로 갈아 입고 비디오 카메라 등을 가지고 각자의 차에 일찌감치 올라탔다.김사장의 벤츠가 앞에 가고 양빈의 초대형 벤츠가 그 뒤를 따랐다.우리는 긴 형렬을 이루어 출발했다.길은 한 번도 막히지 않았다.김일성광장에 도착한 후 양빈은 김사장의 안내하에 로얄박스에 올랐다.우리는 오른쪽 귀빈석에 앉게 되었다.나중에 보니 귀빈석은 각국의 사절들과 무관들이 앉는 자리였다.
우리 바로 앞의 두 번째 줄에 중국대사관 무관과 중국에서 온 군사참관단이 앉아 있었다.그들은 중국인민해방군 총정치부와 선양군구에서 파견한 소규모 군사참관단으로 북한군 건군 70주년기념행사에 참가하러 평양에 온 것이었다.참관단과 같이 온 총정치부 연출단의 배우들도 같이 앉아 있었다.이틀 전 그들은 평양에서 한 차례 경축공연을 벌였는데 김정일이 친히 극장에 와 공연을 보고 함께 기념사진도 찍었다.

관람대 맨 뒤에는 북한인민군 여군관들이 서있었는데,그 자태가 너무 씩씩하고 멋져 각국 무관들의 주목을 끌었다.여군관들의 임무는 바로 우리와 같은 관람객들의 안전을 보호하는 것이다.그녀들은 또한 우리가 사진을 찍자 매우 예절 바른 태도로 금지시켰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당정군의 지도자들이 로열박스에 나타나자 십만 군중과 적위대들이 “만세!만세”를 산이라도 무너뜨릴 듯한 기세로 외치기 시작했다.전에 중앙신문기록영화제작소에서 근무할 때 국경절 행사촬영을 몇 번 나간 적 있어 이런 군중의 환호소리에는 매우 익숙한 편이지만,최근 한동안은 우리 중국에서 이런 광경을 볼 수 없었다.
4월 27일 저녁,우리는 다시 노동자체육관에서 아리랑축제의 리허설을 보았다.
아리랑축제는 북한의 중요한 예술축제로 장장 2개월 동안 공연이 펼쳐진다.우리가 6월 두번째로 평양을 방문했을 때에도 아리랑축제는 계속되고 있었다.이 행사에 참여하는 군중과 배우,학생들만 십만이고 6개월 넘게 연습한다고 한다.
우리가 평양을 떠나기 며칠전 김정일은 김동규 사장을 시켜 양빈대표단이 아리랑축제 리허설을 꼭 보도록 했다.우리가 모란봉호텔 맞은편에 있는 대형 체육관에 도착했을 떄,양빈은 김사장의 안내로 다른 자리로 가서 앉았다.우리는 로열박스 가까운 곳 죄측 상단에 앉았다.체육관 안의 관중들은 대부분 군관들로 우리 몇몇만 초청받은 외국인이였다.나는 난간 옆에 앉았다,난간 쪽에는 양복을 입은 안내원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는데,그들은 경호원들이었다.불과 20미터 아래가 로열박스였기 때문이다.
우리 좌석의 맞은편 관중석에서 펼치는 화려한 카드섹션은 일치된 동작으로 북한의 풍경과 슬로건을 나타내고 있었다.그토록 추호의 틀림도 없는 일사불란한 동작이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의 절정에 오르게 하였다.세계 어떤 나라도 해낼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할수 있을 정도였다.그것은 십만 명의 배우들이 반년 넘게 훈련을 해서 얻은 결과였다.
우리는 그 많은 명절이 모여 있는 4월에 평양에 도착해 다채로운 예술활동을 관람했고,김정일을 두 번이나 만났다. ‘신의주 특구 기본법’에 관한 담판을 위해 왔으면서도 다른 활동이 더 중요해졌다.비록 회담은 진행했지만 주객이 전도돈 격이었다.



별다른 진전이 없었던 제2차 평양회담
4월 평양에 갔을 때 북한에는 명절이 너무 많아서 ,이를테면 평양음악예술축제,인민군 창군 70주년 기념축제,아리랑축제 및 기타 공연을 관람하는 분위기에 완전히 빠져 신의주 특구 회담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우리는 사석에서 그때의 평양행을 ‘배우러 갔다’고 말하곤 했다.
우리가 처음 평양을 방문한 기간에 회담은 모두 평양문화궁 안에서 세 차례 진행됐다.
첫 회담은 4월 24일 열렸다.
우리는 모란봉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북한관리들이 안내를 받아 먼저 평양문화궁에 도착했다.2층의 대휴게실에 앉아 차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동안 김사장이 통역 박성호를 데리고 와서 양빈과 담소를 나누었다.그 뒤 우리들은 3층 대회의실로 안내되었다.
북한측 대표들이 문 앞에서 질서정연하게 우리를 환영했다.
양빈 대표단은 성원은 다음과 같다.양빈,마닝,왕후이둥.둥롄파,뤄웨이젠,리수,왕뤄,
저우팡성,관산,양다융,추이양,통역에 김호,그리고 유라시아그룹의 일꾼 왕치와 류뎬후이 등이다.
북한 대표단은 수석대표는 여전히 김동규 총사장이었다,그리고 11명의 대표와 통역을 맡은 박성호다.
김동규 사장이 간단하게 주인으로서의 말문을 열었다. “여러분 평양에 오셔서 잘 드시고 잘 노시고 잘 쉬고,물론 회담도 잘 이루어지기 바란다.”는 요지의 인사말을 했다.
양빈이 답사를 했다.
“나는 중국에서 자라면서 애국주의와 국제주의교육을 받았다.어려서부터 조선과 중국이 우호적이라는 것과 ‘항미원조’에 대해서 잘 안다.현재 우리는 조선에 와서 신의주 특구를 건설할 것에 대해 담판하고 있다.우리는 모두 한가족이다.한가족이므로 겉치레 말을 하지 말자.신의주 특구는 잘 건설해야 한다.관건은 기본법이다.외국 사업가들이 가장 큰 관심은 기본법의 내용이 어떤 것이냐 하는 점이다.그걸 알고 나서야 그들은 투자를 할것이다.기본법의 가장 중요한 것은 삼권(三權)이다.외국인들은 사법의 공정성 여부,입법으로 투자자의 안전과 이익을 보호해주는지의 여부를 본다.삼권이 보장되지 않으면 기본법도 있을 수 없다.만약 삼권이 특구 장관에게 귀속되면 그것은 특별행정구라고 할 수 있다.이것은 제가 개인적으로 무슨 권력을 얻고 싶어서가 아니라 외국 사업가를 유치하고 특구를 건설하고 관리하기 위해서이다.”
북한 대표단의 한 사람이 양빈의 말을 끊었다.
“양빈 총재.이름만 특구로 하고 실제상으로는 그러니까 내용상으로 특별행정구의 구조를 취하면 되지 않곘습니까?”
둥롄파가 말했다.
“특별행정구라고 하면 행정,사법,입권법이 있으므로 이름만 들어도 납득이 갑니다.그러나 특구라고 하면 매우 애매합니다.
‘삼권’의 개념을 포괄할 수 없지요.경제특구라는 이름은 오히려 명확하기는 한데 경제 행정관리권은 있으나 사법,입법권이 없습니다.조선이 처한 현재의 특수상황 하에 만일 독립적인 사법권,입법권이 없다면 어떤 외국 대기업이나 은행이 신의주에 투자할수 있곘습니까?”
우리가 이번에 가져온 ‘기본법’과 ‘기본합의서’는 지리적 우월성을 지니고 있는 신의주를 가장 이상적인 투자환경구역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즉 대형 외국 투자기업들을 유치해서 그 지역을 금융,무역 ,현대화 산업,오락의 중심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모든 것은 이런 목적을 위해 작성한 것입니다.”
둥롄파 교수가 말한 기본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신의주 특별행정구 기본법(건의용)’을 말하는 것이었다.
기본법은 머리말을 제외하고 모두 9장 82조로 되어있다.
그 뒤 2002년 9월12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통과시킨 ‘정치명령 제3303호 결정’-‘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신의주 특별행정구 기본법’은 모두 6장 101조로 이루어져 있었고 부록 4조가 첨부돼 있다,
독자들이 기본법의 변화과정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기본법(건의안)의 장절을 여기에 수록하자고 한다.
머리말
제1장 총칙(1-10조)
제2장 중앙과 신의주 특별행정구 간의 관계(11-20조)
제3장 주민과 기본 권리 의무(21-39조)
제4장 정치체제(40-48조)
제5장 경제(49-62조)
제6장 문화와 사회업무(63-72조)
제7장 대외업무(73-80조)
제8장 본법에 대한 해석(81조)
제9장 기타(82조)
‘기본합의서’이 정식명칭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와 네덜란드 유라시아무역회사 간의 신의주 특별행정구에 관한 기본합의서’(초안)이다.모두 26조로 이루어져 있었고 장절과 제목이 없다.
회담중에 북한 측 부수석대표가 말했다.
“특별행정구는 우리 나라에서 없었던 일입니다.홍콩과 마카오를 특별행정구라고 부르며 50년 동안 변화없이 일국 양체제로 가는 것은 합당한 일입니다.신의주에 관해 말하자면 우리 국가에서 반복해서 토론해봤는데 지역명칭을 만일 특별행정구로 한다면 당신네 홍콩과 마카오와 같아져 식민지 색채를 띠는 것 같으므로,그래도 특구가 좋다고 생각해 그 이름을 경제특구로 하려고 했습니다.만일 여러분이 특별행정구를 고수한다면 우리는 최고회의에 다시 보고하겠습니다.”
우리는 북한 대표단이 정부 각 부문에서 뽑혀왔기 때문에 특별행정구에 대한 각자의 이해의 정도를 제외하고도 각 부문과 계통의 책임자들의 견해가 있을 것이고,최종적으로는 북한의 최고회의와 김정일 위원장의 견해와 결정에 따를 것이라는 것을 안다.북한 대표단은 지도자의 의도를 집행하고 관찰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양빈측 전문가들의 생각은 아주 실제적이었다,북한이 페쇄돼 있어 외부세계와 국제상의 각종 관례를 모른다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먼저 상대방 대표단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까지 많은 중국정부의 고급관리들이 개혁개방과 국제관례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으며 머리속에는 여전히 계획경제 시대의 낙인이 깊숙이 찍혀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그들이 우리의 관점과 생각을 상부에 반영하는 것 자체도 좋은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둥롄파,뤄웨이젠 두 교수가 회담의 기회를 빌어 북한측에 끊임없이 사정을 소개하고 참을성 있게 설명하여 그들로 하여금 우리의 생각을 더 많이 이해하도록 노력했다.
4월26일 여전히 평양문화궁 3층에서 회담이 속개되었다,2개팀으로 나뉘어 한 팀은 ‘기본법’을 ,다른 한 팀은 ‘기본합의서’를 토론했다,나는 법률팀에.양빈과 마닝은 경제팀에 참석했다.
회담은 4월27일에도 열렸다.이 날은 팀을 나누지 않고 주로 ‘기본법’에 관해서만 토론했다.
양빈은 명칭을 ‘신의주 특별행정구’로 하고 행정권,사법권,입법권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측은 특구에 일정한 행정권,사법권,입법권을 줄 수 있지만 이름만은 ‘경제특구’로 하자는 것이었다.특구에 사법권과 입법권을 줄 수 있다는데 대해 북한측이 처음으로 동의한 것이였다.
그러나 자세한 설명이 따르지 않았다.다음날 양빈 대표단 전체가 평양을 떠날 예정이었으므로 여지를 남긴 것이었다.
4월28일 새벽 5시,리강이 왕뤄,양다융,추이양,왕치 등과 유라시아그룹의 종업원을 데리고 조선여행사가 제공한 버스로 모란봉호텔을 떠나 조선 원예총회사에 가서 김동규 총사장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날은 흐려 비라도 올 것 같았다.버스가 평양을 출발해 고속도로를 달렸다.마침내 비가 내렸다.평양으 떠나 50킬로미터쯤 왔을때 대형 버스가 멈춰섰다.앞에 승용차 한 대가 서더니 김사장이 내려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며 작별인사를 하는 것이었다.60세 가까운 노인이자 북한의 장관급 관리가 우리 일행의 뒤를 따라 50킬로미터의 고속도로를 달려 온 것이었다.버스 안의 모든 사람들이 감동해 마지않았다.
버스는 평양을 떠나 비 속에서 울퉁불퉁한 도로를 달렸다.내가 알기로는 앞으로 아직 180킬로미터를 더 가야 했다.이것이 바로 작년에 김정일이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가던 도중에 단둥역에서 단둥시위원회 차이톄푸 서기와 장줘융 시장에게 “우리도 평양에서 신의주까지 고속도로를 건설해야 합니다”라고 말한 180킬로미터의 노정이다.
버스는 낮 11시 40분에 신의주 세관검사소에 도착했다.12시면 세관이 문을 닫기 때문에 버스 안의 사람들은 모두 조급해 했다.늦으면 오후 2시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그러나 북한 외무성 관리들은 따라왔기 때문에 세관을 통과할 때 번거로운 검사는 없었다.
그때 북한 입국시 만났던 소령을 또 만났다.그가 나에게 물었다. “평양 좋아요?”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라고 대답하자 그는 무척 기뻐했다.스리파이브표 담재를 한 갑 주었더니 더욱 기뻐하면서 내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우리는 단둥에서 보낸 관광버스에 앉아 압록강 대교를 지났다.그때 나는 큰 소리로 나의 친구로 저명한 시인인 샤오옌샹(邵燕祥)이 50년 전에 쓴 시 한수를 읊었다.

압록강을 지나는 차는
날개가 달린 듯
조국이여,내가 돌아왔노라
조국이여,나의 어머님이시여!
중국을 떠난지 여드레 밖에 안됐고,평야이 그토록 아름다웠지만 ,그리고 날마다 명절처럼 보냈지만,조국과 고향을 그리는 마음은 말로 형언할 수가 없었다.
“돌아왔노라!”
모두들 악수하며 기뻐했다.
남영전, 1948년생, 조선족. 길림성류허진1중 고중을 졸업하고, 길림성작가진수학원 졸업후<<장백산>>(조선문)잡지 총편집직이였다.중국작가협회 소수민족위원회 위원、세계시인대회 평생회원、중국조선족발전연구소 소장. 1971년에 시작품을 발표하였다. 작품은<<샹쓰집>>,<<산혼>>,<<신단나무>>,<<뻐국새>>,<<원융>>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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