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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훔친

제10장 신의주 특구장관 취임선서 전후 18일

“나는 며칠 뒤에 평양갑니다”
북한측 대표단을 떠나보내고 양빈은 네덜란드촌 건설을 정돈하는 일로 매일 분주히 보냈다.그 즈음에 ‘네덜란드촌 건설이 중단됐다’ ‘양빈이 북한투자를 위해 자금을 이전한다’는 등의 소문이 무성했기 때문에 네덜란드촌 건설을 더 이상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소문이 점점 심하게 번지면서 선양시와 랴오닝성 정부의 간부들까지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며 전화를 걸어왔다.
그런 질문에 양빈은 최대한의 인내심을 갖고 해명했다.해명이란 듣기 좋은 말이고 그건 말 그대로 고역이었다.”있는 돈을 다 네덜란드촌에 쏟아 부었는데 어찌 그걸 다 짊어지고 간단 말이요?친구들,왜 믿지를 못해?”양빈이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이제 해명은 필요 없었다.직접 행동으로 그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면 그만이었다.그러나 양빈의 자금은 이미 바닥이 드러난 상태였고 더 이상 지탱할 여력이 없었다.
건축회사에 나머지 공사비도 지불해야 했다.비율로 따지면 체불 공사비가 전체의 30% 정도였으니 많은 것은 아니었다.중국에서 건축시공 공사비를 70% 지불할 수 있는 실력이면 그건 대단한 기업이었다.그런데 유라시아그룹 종업원들의 2개월 노임을 체불한 것이 문제를 더 크게 만든 계기가 됐다.
헤이그호텔의 종업원은 대부분 현지 농민들이었고 운수대의 기사들 상당수가 선양시민이었다.이들의 노임을 체불했으니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고 소문은 하나 둘 입을 거쳐 네덜란드촌과 선양시에 전염병처럼 퍼졌다.
설상가상으로 펑숴(馮朔)라고 부르는 유라시아그룹의 회계주임 또한 만만치 않는 인물이었다.유라시아그룹의 고급 관리자가 정상적인 업무 결제를 받으려 해도 가치없이 퇴짜를 놓는 그런 무서운 사람이었다.설령 양빈이 직접 싸인을 해도 막무가내였다.
아무리 회계주임이라지만 아직 새파랗게 젊은 여자의 건방진 태도에 유라시아그룹의 관리자들은 한바탕씩 노발대발 화를 내곤했다.어디 그뿐인가.유라시아그룹에서 봉급을 받지 않는 양빈대표단 성원들이 왕복 비행기 티켓도 ‘돈이없다’는 핑계로 결제를 거부하기는 마찬가지였다.양빈이 직접 싸인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내 말 한 마디면 끝이야.내가 결제를 한다면 하는 것이지,양회장 싸인이 무슨 소용이 있어?돈이 없다면 그만인걸.”
그녀는 이런 말까지 서슴지 않고 내뱉었다.양빈 대표단 성원들을 대하는 태도가 이러했으니 공사대금을 받으러 온 채권자들에게 그녀가 얼마나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는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녀의 얼음장 같이 차가운 태도가 결국 붙는 불에 부채질하듯 양빈의 이미지를 더욱 여지없이 손상시킨 것이다.그처럼 날뛰던 그녀도 양빈이 체포된 후 얼마 안 지나 어음위조 등 혐의로 공안기관에 구속됐다.
자금난이 아무리 크더라도 네덜란드촌 공사는 마무리를 해야했다.
8월 중하순쯤,양빈은 미쓰비시 지프차를 운전하며 네덜란드촌 구석구석을 직접 돌아보았다.가끔 내가 그와 동행해 함께 돌아보곤 했다.그러나 동안 네덜란드촌 북쪽입구 주유소 앞에 지저분하게 널려 있던 벽돌과 기와조각들이 깨끗이 청소되었고 상품주택주변의 화단이 만들어졌다.도로 양측에 파란 잔디가 깔렸고 5성급 호텔을 지을 땅에 남아 있던 장벽이 철거되었으며 골프장의 잔디도 깨끗이 손질됐다.네덜란드촌의 큰길 양측과 상품주택 일대에 작은 변화가 생겼고 네덜란드촌에 활기가 도는 것 같았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이 있다.만약 양빈이 이떄라도 결단을 내리고 토지용도 변경세금을 청산했다면,그리고 실업회사에 존재하는 문제점을 합리적으로 처리하고 회사 이미지 회복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면 ‘때는 늦지 않았을 것’이다.적어도 참담한 패배는 없었을 것이다.그러나 아쉽게도 양빈의 ‘대세에만 몰두하는 약점’과 타인의 충고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성격은 끝내 돌이킬 수 없는 패배를 불러오고야 말았다.
양빈과 그의 ‘신의주 특구 협상 및 건설’을 맡고 있는 고문들은 저마다 죄이는 듯한 긴장감을 느꼈다.협상은 끝났지만 북한측이 언제 ‘기본법’을 통과시킬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누구도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고 양빈 자신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그런 외중에 들려오는 소식 또한 불안만 더해주는 것뿐이었다.우선 국가세무총국과 랴오닝성 및 선양시 세무기관이 네덜란드촌의 장부검사에 착수했다는 소식이었다.
양빈은 “포브스가 선정한 중국부호 중 랭킹 10위는 모두 세무부문의 검사를 받아야 하고 외자기업은 3년 면세 대우를 받는데 그 기한이 아직 1년이 남았다”면서 “부동산 토지용도 변경수속을 했고 또 토지증과 부동산 매매허가증도 있으니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나는 확실히 상기의 증명서와 수속을 내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있다).
“세금 체불은 있습니다.토지용도 변경서 그까짓 것 말입니까?시정부가 내게서 빌려간 1억 위안이면 그 세금을 내기에 충분합니다.토지재산세 1,000여만 위안에 토지양도금 4.000여만 위안을 제하고도 시정부는 내게 몇 천만 위안을 돌려줘야 하는데!”양빈이 내게 불만스러운 투로 말했다.
나는 양빈의 수하에서 부총경리로 있는 리강과 스쥔에게 이 사실을 확인한 적이 있다.리강에 따르면 선양시 정부는 확실히 양빈으로부터 8,000여 만 위안을 빌렸고 그때까지 갚지 않고 있었다.토지부문에서 토지용도변경세금을 납부하라고 독촉하자 양빈은 선양시 정부에 그 돈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지만 선양시 정부는 양빈에게 먼저 세금을 내라면서 그 돈은 나중에 갚아주겠다고 했다.그러나 자금난이 계속되고 또 행여 선양시 정부가 돈을 갚지 않을까 걱정했던 양빈은 토지용도변경세금 4,000만 위안을 체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일은 랴오닝성과 선양시 정부 관리들이 나서서야 잠시 해결이 뒤로 미뤄졌고 양빈이 보유하고 있던 토지증과 부동산 개발허가증은 계속 효력을 발생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그러나 당시 이런 후지부지한 일은 후에 언론이 양빈을 공격하는 이유의 하나가 됐고 탈세 그리고 농경지에 부동산을 대량 개발했다는 것이 양빈의 큰 죄목이 됐다.양빈은 중국의 법률이나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했다.대신 지방정부의 ‘특혜정책’에 큰 기대를 걸었던 것이 잘못이었고 실패를 자초한 중요한 원인이었다.
또 다른 불리한 소식,그것이 대만의 류타이잉(劉泰英)과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의 아들도 신의주 특구에 끼어 들려고 북한측과 접촉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대만 홍콩의 친구들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들은 나는 양빈의 고문들에게 행여 거짓 소문일까 직접 물어보았다.그들도 친구들로부터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이제 그럼 어떻게 되는 것인가?신의주 특구 프로젝트를 위해 그 동안 해왔던 노력들이 다 수포로 돌아간단 말인가?양빈의 고문들은 ‘북한측 협상단’의 상당수가 북한 정부의 주요 관원들이고 또 지난 몇 개월 동안의 접촉으로 봐서 인간성이나 일처리가 정직해 보이는데 어중이 떠중이 같이 신용을 버리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시각이었다.
나는 네덜란드촌에 머물고 있었기 떄문에 선양의 둥롄파 교수와 다롄의 왕뤄 항구 설계원장과 만날 기회가 많았고 우리 몇 사람은 만나면 자연히 이런 저런 문제를 놓고 논의했다.둥교수는 북한이 기본법 제정에 있어서 상당히 진실성 있고 책임지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했다.북한 인민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는 왕원장 역시 북한의 개방을 위한 노력을 높이 평가했다.
양빈의 여러 고문들 가운데 내 나이가 가장 많았다.원로세대 혁명가들로부터 받은 애국주의와 국제주의 교육은 내 정신세계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나는 베이징에서 근무할 당시 김정일 위원장의 중국방문 환영회에 참가했었고 2002년 4월에는 평양에서 김정일 위원장을 두 번이나 만날 기회를 가지는 등 북한과 인연이 깊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나는 둥롄파,왕뤄 등 세 사람은 북한에 대한 애정과 믿음이 깊었다.둥교수와 왕원장은 내가 네덜란드촌에 머물러 있고 또 양빈과 만나는 시간이 많다면서 시간이 나면 양빈과 대화를 많이 하라고 일러주었다.
그날 밤,양빈의 운전기사 선량(沈良)으로부터 양빈을 찾아왔던 손님들이 다 갔다는 말을 듣고 나는 양빈의 별장에 갔다.객실에 들어서 담배를 붙혀 물기도 전에 위층에서 양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관선생님,빨리 올라오세요.”
나는 2층으로 올라갔다.양빈은 금방 샤워를 하고 소파에 앉아 있었고 선량이 양빈의 발과 다리를 안마해주고 있었다.선량은 양빈의 운전기사 겸 안마사였다.허베이(河北)성 농촌출신인 선량은 됨됨이가 무던하고 솔직했으며 특히 운전기술이 뛰어났다.
“조선에서 소식이 있어요?”
자리에 앉으며 양빈에게 물었다.
“없습니다.”
“관선생님은 조선이 기본법을 통과시킬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양빈은 짤막하게 대답하면서 내게 되물었왔다.
나는 ‘조선이 기본법 제정에 있어서 진실성 있고 책임지는 태도를 보인다’는 둥교수의 분석을 대답으로 대신했다.중요한 것은 조선 최고인민회의와 김정일 위원장이 이를 승인하느냐,언제 승인하느냐는 것이다.
양빈이 담배를 한 대 붙여 물며 입을 열었다.
“제 생각도 그래요.그런데 이건 함정이라는데 .우리측 사람들중에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함정이란 말은 양빈의 랴오닝성 친구와 상인들이 입에서 처음 나왔다.그러나 양빈이 신의주 특구 장관으로 임명되자 이 사람들이 오히려 누구보다 빨리 양빈에게 아부하러 달려왔다.자기네들이 신의주에서 뭔가 할수 있게 편의를 봐달라는 것이었다.
양빈이 말하는 ‘우리측 사람’은 양빈의 고문 가운데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그 고문은 양빈에게 상업규칙을 지킬 것을 권유했다.다시 말해 일을 시키려면 돈을 줘야 한다는 주장한 것이다.북한측과 접촉하는 동안 회담 대표들은 양빈으로부터 일전 한푼의 보수도 못 받았는데 이는 상업규칙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했다.그떄까지 양빈의 대표단 성원들은 ‘사업이 위주’임을 강조하면서 아무도 돈을 거론하지 않았다.물론 상인의 입장에서 상업규칙을 지키자는 주장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왕뤄는 이런 말을 자주 했다.
“돈 때문에 양빈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중요한 것은 평생에 신의주 특구와 같은 큰 일에 참여한다는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내가 왕뤄의 이 말을 양빈에게 들려주자 양빈은 크게 감동하며 말했다.
“몇 개월 동안 모두들 수고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저라고 왜 수고한 분들에게 보수를 드리고 싶지 않겠습니까?그런데 관선생님,믿고 하는 말이지만 자금사정이 안 좋아요.도저히 변통할 수가 없어요.특구에서 자금이 마련되면 우선 여러 분의 몇 개월 밀린 임금부터 드리겠습니다.헛 고생하게 해서는 안 되지요.”
“모두들 돈 떄문에 일하는 것이 아니지요.자오성리(橋勝利)의 한달 수입이 당신이 그에게 주기로 약정한 임금보다 몇 배 더 높지않습니까.그래도 왜 이 일을 하고 있겠습니까?그건 신의주 특구가 만들어지면 동북아 지역의 평화와 발전에 이롭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웡융시도 프로젝트 한 건만 성사되면 수천만 위안의 수입이 생기는데 당신의 몇 십만 위안 연봉에 연연해서 그러는것이 아니지요.동교수나 왕원장의 수입도 적지 않지요……”
내 말을 조용히 듣고만 있던 양빈이 입을 열었다.
“신의주 특구 프로젝트가 성사된다면 나 양빈이 아니라 여러분이 이뤄낸 것입니다.그떈 제가 여러분을 위해 일하겠습니다.신의주 특구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할 일이 너무 많아요.우리 모두의 장기를 마음껏 발휘해 뭔가 일을 성사시키기를 바랄 뿐입니다!”
나는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의 아들과 대만의 류타이잉이 신위주 특구 때문에 북한측과 접촉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는 사실을 양빈에게 알려주었다.내 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양빈은 아무반응이 없었다.북한은 신의주 특구 장관으로 자신을 유일한 후부로 지정하고 있음을 확신하는 듯했다.적어도 북한 인민을 위해 실제 행동을 보여줬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기본법 회담이 끝나고 북한 중앙정부의 승인만 받으면 일은 성사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기와 ‘모든 것은 준비가 됐고 이제 동풍만 불면 되니’동풍이 불도록 조금만 더 노력하라고 양빈을 격려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는 탁자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기회란 단 한 번이고 잃어버리면 다시는 오지 않는 법입니다.”2층 계단을 다 내려왔을 떄 위층에서 양빈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나는 몇일 뒤에 평양에 갑니다.”
2002년 8월말 어느 날 밤의 일이다.


드디어 기본합의서 체결

9월4일 오전,양빈 홍콩 도착.
9월5일 오후,양빈,마닝,차오성리 등 일행 마카오 도착.
9월7일 오후 6시,전세기를 탄 양빈,마닝,차오성리 등 일행이 평양 도착.왕뤄 등은 이미 1시간 전에 평양 모란봉국빈관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9월7일 신의주에서 자동차를 타고 평양에 갔습니다.모란봉국빈관에 도착한 시간은 정확히 오후 5시,얼마 안 지나 도착한 양빈 일행과 만났습니다.”
왕뤄의 말이다.그는 통지를 받고 평양에 오기는 왔지만 무엇 떄문에 왔는지 알지 못했다.양빈 자신도 기본법이 언제 통과되는지 모르고 있었기 떄문이다.
9월8일,웡융시 평양 도착.
그 이튿날인 9월9일,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창건 54주년 맞이 국경연회가 열렸는데 양빈이 초대됐다.
다른 일 때문에 웡융시는 베이징으로 돌아가야 했다.평양을 떠나면서 웡융시는 국경연회에 북한주재 중국대사가 꼭 참석할 것이라고 하면서 양빈에게 중국대사를 만나면 북한의 신의주 특구건설계획을 설명하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양빈을 특구 장관으로 임명할 예정이므로 대사께서 중국 정부에 이 사실을 전달하시고 전반적인 지지를 부탁하라는 등의 당부를 했다.

2002년9월24일 ‘합의서’조인식이 평양문화궁전 2층에서 거행됐다.
앞줄 왼쪽이 양빈,오른쪽이 김용술 북한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위원장이다.
양빈이 국경연회를 마치고 돌아오자 마닝 등은 등은 그에게 “중국대사님을 만났습니까?”라고 물었다.양빈은 북한주재 중국대사는 마침 베이징 출장 중이어서 연회에 참석하지 못했으며 대신 북한 주재 중국공사가 참석했고 장진팡(張錦芳),자오자밍(趙嘉明)등 중국 신화통신과 인민일보 기자들이 참석했다고 말했다.
양빈은 이어 이야기했다.그는 사람들로 북적대는 연회장에서 중국공사를 어렵게 찾았다.공사 앞에 다가선 그는 자기소개를 했다.공사가 나는 당신을 알고 있다.TV에서 봤다.당신이 홍콩의 봉황TV방송국 쩡즈모 기자와 가진 인터뷰가 TV를 통해 40분 정도 방송된 적이 있다고 했다.
양빈은 공사에게 북한의 신의주 특구 건설계획을 간단히 설명하고 ,자신이 특구 장관으로 내정되었으니 중국정부의 지지를 희망한다며 그 뜻을 중국정부에 전달해줄 것을 부탁했다.
2002년 9월 24일,“합의서”는 평양문화공 2층회의실에서 진행하였다. 아래 그림 좌측부터 첮번째가 양빈이다. 오른쪽첮번째가 조선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위원장 김용술
9월11일,차오성리는 부인이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이튿날 황급히 평양을 떠나 선전에 갔다.웡융시와 차오성리가 잇따라 평양을 떠나자 평양에는 양빈과 마닝,왕뤄 그리고 선양에서 막 평양에 도착한 둥롄파 교수 등 몇 사람만 남았다.
“나는 9월11일 선양을 출발해 오후 3시 30분경에 평양에 도착했습니다.비행기에서 내려보니 조선측에서 마중을 나와 있었습니다.우리를 채운 승용차는 대동강의 부두까지 곧바로 달려갔습니다.부두에 정박한 기선에 올라가 보니 양빈과 마닝,왕뤄 차오성리 등이 모두 그곳에 있었습니다.평양시장이 마련한 소규모 연회였죠.평양시장이 연설과 함꼐 양총재 및 그 일행의 참석에 대해 고맙다고 인사를 했고 양총재도 감사하다는 인사로 답례했습니다.모두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흥을 돋우었습니다.날이 퍽 어두워져서야 우린 모란봉국빈관에 들어왔습니다.”둥롄파의 말이다.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무위원회가 ‘신의주 특별행정구 기본법’을 통과한 것은 9월12일이었지만 양빈이 정식통보를 받은 것은 9월18일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9월13일 부터 17일까지 양빈과 그의 고문들은 모란봉에서 한담으로 시간을 보내며 기본법이 통과되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9월18이 북한측에서 양빈에게 ‘신의주 특별행정구 기본법’이 통과되었음을 통고했다.양빈의 큰 웃음소리가 방안을 채웠고 그의 두 눈은 오랜만에 웃음으로 실눈이 됐다.
며칠 후 북한측은 양빈과 합의서를 체결하고,양빈은 북한 최고인민회의에서 취임선서를 하기로 했다.
양빈은 소식을 전하러 온 북한의 김사장의 손을 잡으며 “김사장,그 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조선 친구들 참 수고 많았어요!오늘 밤 이 모란봉에서 제가 여러분을 초대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날 밤,북한 대표단 성원들이 모란봉국빈관에 초대됐다.양빈 그리고 그의 고문들은 이들과 함꼐 술잔을 나누며 축제의 분위기에 젖어있었다.
양빈이 드디어 신의주 특구 장관에 임명되었다.1년이 넘는 동안 쏟아부은 심혈은 얼마이며 밧줄타기 같은 도박을 하며 마음고생인들 얼마였던가.단순히 짧다고만 볼 수 없는 1년여의 시간이었다. ‘고아에서 장관이’되기까지 30여 년의 기나긴 세월이 걸린 승부였다.양빈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내기에서 이겼다고 생각했다.이 순간만은 모든 것을 잊고 싶었고 자신이 특구 장관이 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싶었다.
그날 밤,만취해서 방으로 돌아왔다.그런데 방에 들어서자 또 곧바로 네덜란드에 있는 부인 판차오룽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양빈이야……당신 남편,신의주 장관이 됐어!”
그리고 그녀에게 애들을 데리고 평양에 오라고 했다.그날 밤,그의 기억은 여기까지가 전부였다.
남편이 흥분으로 들뗘 있는 목소리를 들으며 판차오룽은 가슴을 답답하게 누르던 천근 무게의 돌덩어리가 땅에 떨어짐을 느꼈다.마음은 날 것 같이 홀가분해졌다.그녀는 마카오로 향했다.마카오에서 비행기를 갈아 타야 평양에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기억은 없었지만 양빈은 그래도 상업이란 전쟁터에서 오래 동안 뒹굴어 온 사람이 분명했다.부인과 통화를 하고 나서 그는 홍콩의 일성공관회사 양잉잉(楊瑩瑩)에게 전화하는 것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회신기자들을 22일까지 평양에 불러와,로이터,AP,뉴욕타임스,일본 TBC,교통통신,요미우리신문,BBC,그리고 봉황위성TV도……”
“비용?내가 낼 거요.500만 홍콩달러라고?그래 문제없어.”
양잉잉은 과연 양빈이 기대했던 대로 쟁쟁한 외신기자들을 데리고 평양에 왔다.솔직히 신비의 땅으로 알려진 북한에 와보고 싶은 외신기자가 어찌 한 두 명이겠는가.그렇게 가고 싶던 땅이고 또 지금 그 땅에서 세계적인 뉴스가 생겼는데 이 기회를 마다할 외신기자가 어디 있을까?
“양잉잉이 목돈을 단단히 벌었지요.”
이 일이 지난 후 양잉잉의 한 측근이 나에게 말했다.
양빈이 술을 많이 마셨으나 잊지 않고 봉황위성방송국의 쩡즈모에게 전화하여 그분에게 특구장관임명식에 참석할것을 요청하였다. 그후 쩡즈모은 이렇게 얘기하였다. 2002년9월18일 늦은밤 거의 12시가 되였다.나는 또한번 양빈의 전화를 받았다.이번에는 양빈이 다른 얘기도 안하시고 잡담도 하지 않고 중점을 바로 얘기하셨다.”소쩡아,나는 지금 평양에 있어!조선신의주에서 홍콩같은 특별행정구을 설립할려고한다.나는 특구장관이다. 며칠 지나면 임명식을 하는데 당신들이 참석할수 있어? “ 9월22일,나와CNN,BBC 등의 많은 기자들과 함께 평양에 도착하였다.그 이튿날 오전, 양빈이 우리가있는 고려호텔에 오셨다. 모두들 서로 같이 얘기를 나누고있는데 양빈은 신심이 당당하고 큰 발걸음으로 신의주 기자회 현장에 도착하셨다.“이때 양빈이 자리에 앉으시면서 한쪽으로 우리를 향하여 웃으면서 얘기하였다.“도착하셨어요?잘 주무셨나요?” “봉황에 대하여,양빈은 특별히 관심과 신경을 많이 써주고 있다. 모두들 앞에서 양빈은 감춘것이 없게 ”첫번째 문제 제출권을 봉황방송국에서 드립니다 !첫번째 독자 방문도 봉황에게 드릴 것입니다 !’”

양빈이 나를 불러 선서의식에 참가하다
2002년9월19일 밤 11시가 되었을까.나는 예나 드름없이 잠자리에 누워 그날 ‘참고소식’신문을 들었다. ‘조선의 외교자세와 동북아의 기회’1면 톱기사의 큰 제목이 내 시선을 끌었다.그러나 기사를 읽기 전에 머리 속에 언뜻 스치는 것이 있었다.
먼저 떠오른 것이 9원18일자 싱가프로의 ‘해협시보(海峡时报)’에 실린 북한의교에 관한 논설이었다. ‘예상외의 내부개혁 및 국제사회와 북한의 상호교류가 이뤄지는 가운데 북한은 인접국과의 교류를 시작하고 있다. 바로 어제, 고이즈미 일본수상이 북한에 대한 역사적인 방문을 했다’작가는 에릭 타오라는 외국인이었다.
다음 8월23일,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가진 회담이 생각났다.푸틴의 ‘북한카드’는 1조3석의 효과를 노리는 것이었다.첫째,북한이 미국, 일본,한국과의 대화에서 러시아는 중재자가 되기를 희망한다.둘째,경제분야에서 시베리아횡단철도 및 한반도 중단철도를 연결하고 시베리아 석유가스건을 개발해 북한을 거쳐 한국에 수송하기를 희망한다.셋쨰,북한이 인력이 아니라 현금으로 채무를 상환하기를 희망했다.
그런 의미에서 러시아는 북한이 경제개혁과 대외개방을 시행하고 미국 일본과 한국의 자금을 유치하게끔 부추기는 셈이다.이렇게 되어야 상방의 재무,채권 문제를 해결할수 있는 것이다.
김대중,푸틴 그리고 이제는 고이즈미 일본수상까지 차례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만나고 있었다.그럼 중국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북한에 대한 관심이 지극했던 내 마음이 초조해졌다.


2002년9월23일,오무5시, ‘합의서’체결의식이 평양인민문화궁전에서 거행됐다.
양빈과 김융술 북한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위원장이 ‘합의서’를 교환하는 장면
그러나 솔직히 싱가포르 ‘해협시보’의 그 논설문은 나의 초조한 마음을 달레는 데 도움이 됐다.
중국이 또 다시 북한의 정치,경제발전의 주요 협력자가 될 전망이다.북한은 중국의 경제개방과 발전 모델을 따라 배우고 있다.따라서 한반도 평화의 최대 수혜자는 베이징이 될것이며 중국상인은 북한 기업인들의 가장 믿음직한 ‘길잡이’가 될것이다.
특히 중국의 경제력과 세계적인 영항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환경 하에서 북한의 ‘맏형’구실을 하는 중국은 북한이 외부세계와 연결하는 관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발휘하게 될것이다.
한반도의 평화는 중국적으로 동북아 지역의 발전에 원동력이 될것이며 북한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동북아 경제발전을 촉진할것이다.
나는 에릭 타오의 관점에 동의한다.한반도는 확실히 평화와 발전이 필요하다.북한의 경제개혁과 대외개방은 북한 인민뿐 아니라 주변국가의 동북아 지역의 정치 경제적 안정과 발전에 새로운 계기가 되기 떄문이다.그렇게 되면 중국은 동북아 지역의 평화와 발전의 촉진자와 협력자 및 수혜자가 될수 있었다.
그렇다면 북한이 추진하고 있는 신의주 특구는 분명 북한 개혁개방의 선두에 설것이었다.
‘그래.중국은 반드시 신의주 특구를 지지할거이야.’
극도의 흥분이 나를 감쌌다.
바로 이때,휴대폰 벨소리가 우렸다.수화기 저쪽에서 양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관선생님,지금 어디세요?”
양빈과 협상대표들은 평양에 머물고 있는 중이었다.양빈은 모란봉국빈관2층 자기 방에서 내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그가 머문 방에만 국제전화가 설치됐고 다른 방은 없었다.
전화를 받으면서 나는 본능적으로 침대 옆 탁자에 놓인 시계를 쳐다봤다.시침은 밤12시를 가리키고 이었다.평양시간으로 새벽1시였다.양빈은 내가 네덜란드촌에 머물고 있는 줄 알고 그쪽에 먼저 전화를 했던 것이다.
“베이징 입니다.”
“기본법이 북한 최고 인민회의에서 통과됐어요.신문발표회도 곧 열립니다.관선생님은 내일 비행기로 선양에 가세요.조선 외무성에서 선양영사관에 통지를 했으니 그 쪽에서 알아서 해줄것입니다.빨리 평양으로 오세요.”
전화 소리긴 하지만 양빈의 흥분된 목소리가 분명했다.
나는 가슴에 얹혀 있던 커다란 돌맹이가 땅에 굴러 떨어지는 것같았고 큰 짐을 벗어버린 듯한 느낌이었다.온 몸이 그대로 둥둥뜨는것 같았다.
수개월 동안의 노력이 드디어 결실을 맺게 된것이다.네덜란드촌에 있는 동안 우리가 받았던 온갖 불공정한 대우와 터무니 없는 억측들이 그순간 이상하게 깡그리 잊혀졌다.
“좋습니다.내일 일찍 선양으로 떠나겠습니다.”
양빈에게 이렇게 대답하며 나는 전화를 끊었다.그날 밤은 정말 많은 것들을 생각나게 하는 잊지 못할 밤이었다.
내가 탄 중국국제항공사 비행기가 선양의 도선공항에 도착한것은 9월20일낮11시경이었다.그러나 평양으로 가는 길은 순탄치 않았고 이런 저런 불편은 그후 10여일 동안 내내 나를 괴롭혔다.불길한 예감이 슬슬 밀어오기 시작했다.
네덜란드촌에 도착해보니 출국여권 업무를 관리하는 돤샤오훙(段小红)이 단둥 출장중이었다.설상가상으로 그 다음날인 21일과 22일은 토요일과 일요일이어서 북한 영사관이 쉬는 날이었다.여권을 받으려면 월요일까지 기다릴 수빡에 없었다.그런데 공교롭게 북방항공사가 평양 항공선을 취소하는 바람에 평양을 가려면 수요일 고려항공을 탈수밖에 없었다.별수 없었다.먼저 단둥에 가서 ‘통행증’을 받아가지고 신의주까지 간 다음 평양에서 마중 오면 차를 타고 평양까지 갈 생각이었다.
그날 오후 나는 단둥을 향해 쏜살같이 차를 달렸다.날이 어두워서야 단둥에 도착했다.단둥호텔에 들어선 얼마 안 지났는데 단둥시 정부의 친구가 찾아왔다.
그 친구가 하는 말이 설령 ‘통행증’을 발급 받느다 해도 신의주까지 갈수 있을뿐 평양은 갈수 없다는 것이었다.단둥에 출장중인 된샤오훙에게 연락을 했더니 그는 선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있다는것이었다. 더 이상 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친구와 한담이나 하면서 그 하루 밤을 지내기로 했다.
이튿날은 토요일이었다.평양에 연락을 해밨지만 통화가 되지않았다.선양네들란드촌에 돌아온것은 그 다음 날인 일요일이었다.
월요일 오전9시,돤샤오훙이 내게 평양으로 가는 비자를 받아주었다.그걸 받아쥐기 바쁘게 나는 다시 단둥으로 향했다.140KM의 시속으로 승용차는 고속 질주했다.봉황산에 도착할 무렵,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양빈총재 사무실의 하비서가 평양에서 걸어온 것이었다.
“관선생님,지금 어디신지 양총재님이 묻고 계십니다.”
“단둥으로 가고 있소.지금 막 봉황산을 지나고 있소.”
“알겠습니다.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승용차가 단둥 시내에 들어설 무렵,휴대폰 벨소리가 또 울렸다.여자의 목소리였다.유라시아평양농업회사의 통역이었는데 언젠가 평양에서 나를 만난적이 있다고 한다.어디까지 왔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나는 승용차가 막 단둥 도심으로 들어가고 있으며 단둥호텔에 묵을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단둥 시내에 도착해 호텔에서 잠깐 숨을 돌리고 있는데 평양의 그 통역이 또 전화를 해왔다.압록강은 어떻게 건널 것이냐는 문의였다.
“평양으로 가는 비자를 받았어요.여기는 신의주까지 괜찮지만 평양에서 신의주까지 마중을 나와줘야 할것 같아요.”
“네.양총재님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가 기뻐하는 심정으로 말하였다.
이때가9월23일오후 5시였다.그 시각 양빈은 회담대표와 유라시아그룹의 간부들과 함께 평양인민문화궁전 회의대청에서 역사적인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양빈은 외신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북한측과 합의서를 체결했고,북한 정부는 그 자리에서 신의주특구 기본법을 발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한이 신의주를 특별행정구로 지정했으며 특구 장관에 네덜란드 국적의 중국인 양빈이 임명됐다는 뉴스가 전파를 타고 세계에 알려졌다.
그러나 나의 평양행은 그때까지 이뤄지지 않았다.9월24일 오전10시,나는 양빈 총재 사무실 류비서의 전화를 받았다.
“조선측에서 승용차를 신의주까지 파견할수 없습니다.오늘 오후 평양시간으로 5시에 조선최고인민회의에서 특구 장관 선서의식이 거행될것이며,양빈 일행은 25일 비행기로 선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그러니까 관선생님께서 평양에 와 선서의식에 참가할 희망이 거의 없네요.”
나는 금방 대답하였다.
“알겠습니다.내일 선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며칠 동안 베이징—선양—단둥을 오가며 분주히 돌았지만 끝내는 양빈 전기를 쓰는 작가로서 평양에 가서 그 역사적인 순간을 지켜보지 못하는 유감을 남겨야 했다.
25일 정오쯤에 나는 선양의 네덜란드촌에 도착했다.


신의주 특구장관 신서의식

양빈이 북한측으로부터 기본법이 통과되었음을 정식 통고 받던 9월18일 밤,양빈은 홍콩 일성공관회사의 양잉잉에게 외신기자를 조직하여 반드시 22일에 평양에 도착하야 한다는 초청 부탁을 한후 단독으로 봉황위성텔레비전방송국의 여기자 쩡즈모에게 전화를 했다. ‘베이징 여자’쩡즈모는 양빈이 국내의 언론의 질타를 받고 있을 때 취재팀을 인솔하여 선양의 네덜란드촌을 찾아와 양빈을 인터뷰했었다.양빈은 봉황위성방송국의 취재 기사가 비교적 객관적이고 공정하다고 생각했다.그 떄문에 쩡즈모에 대하여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되었다.쩡즈모는 그 후의 기사에서 그가 북한에 찾아가게 된 연유를 언급하였다.
“9월18일 밤이 깊었는데 평양에서 걸어온 전화를 받았다.조선은 곧 신의주 특별행정구를 설립하고 입법 행정과 사법의 삼권 분립제도를 시행할것이며 신의주 특별행정구의 첫 행정장관으로 홍콩 증시에 상장한 유라시아농업의 주석 양빈이 내정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여기서 쩡즈모가 소홀히 한 점이 있다.양빈을 ‘행정장관’에 취임한다고 했는데 행정장관이 아니라 ‘특별행정구 장관’이다.특구 장관이라야 산하에 입법행정 사법 등 사권을 둘수 있다.그러니 양빈은 ‘행정장관’과 ‘특구장관’을 겸하게 되는 셈이다.이점에 대해 사람들이 ‘다 같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
“9월22일 우리는 금록항공회사(金鹿航空公司)의 전세기를 타고 홍콩을 출발해 평양으로 향했다.CNN,BBC,AP,사우스차이나 모닝 포스트 등 세계적인 언론사 기자들과 동행했다”
쩡즈모를 비롯한 외신기자들이 타고 갔던 금록항공사의 전세기는 양빈이 세를 낸 것이다.양빈은 그런 전세기가 그것 말고 또 한대가 있었다.홍콩과 마카오 선양 평양 등지를 오갈 때마다 이용했으며 양빈 대표단 성원들도 평양에 갈 때면 가끔씩 이용했다.
그러니까 오전9시에 홍콩을 출발한 쩡즈모 일행은 8시간뒤에야 평양의 순안 국제공항에 도착한 것이다.석양이 서쪽 하늘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을 때였다
그들은 ‘멀고 먼 신비의 땅’에 드디어 발을 들여놓았다.그 땅은 딛고 선 외신기자들이 격동으로 마음이 설레었고 그 감정은 미묘했을 것이다.북한 땅에서 나오는 모든 소식이 그처럼 신비했고 또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공항에 들어서면서 기자들의 이런 기분에는 상관없이 북한 세관의 엄격한 검사를 받아야 했고 휴대폰은 입국 금지물품으로 세관에 보관됐다.
외신기자들은 북한측의 안내를 받으며 승용차에 탑승했다.승용차는 순안고속도로를 따라 질주하더니 금방 시내구역에 들어섰고 어느새 고려호텔 앞에 멈추어 섰다.
고려호텔은 불과 며칠 전 고이즈미 일본 수상이 방문시 일본정부의 연락 총본부와 일본 외모성 보도관 및 일본 서방의 기자들이 머물렸던 호텔로서 평양에서 외국인 입주를 허용하는 제2의 호텔이다.제1호호텔로 불리는 양각도호텔은 그 곳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있었다.평양에는 외국인 입주가 허용된 호텔이 이렇게 두개뿐이며 꽤나 현대화한 고층 빌딩이라고 한다.쩡즈모는 평양 첫 인상을 ‘아름답고 순수한 도시’라고 했다.
9월22일,쩡즈모를 비롯한 외신기자들이 평양에 도착한 그날 세계의 많은 통신사,텔레비전방송국과 신문들이 북한이 신의주를 특구로 지정했다는 소식을 일제히 보도함과 동시에 논설을 발표했다.
[AFP 베이징9월22일 발] 북한이 한 변경도시를 ‘특별행정구’로 지정했다.이는 세계의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거대한 미개발 시장이 개방으로 향하고 있음을 의미한다.20년 전 중국 남부지역의 선전에서 발생했던 천지개벽의 변화가 예고되고,있다고 분석가들은 보고 있다.
신의주는 중국과 북한을 가로질러 황해에 흘러드는 강 하류의 서쪽에 위치해 있다.북한의 중요한 대외무역 통로로서 중국의 단둥시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북한 정부는 신의주 특구에 토지개발과 이용 및 관리 권한을 부여할 방침이며 해당지역의 기업이 북한인 고용을 허용할 예정이다.이 정책은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킬 것이며 허대한 외국투자자가 이 정책의 이로운 점을 점점 의식하게 될것이다.
북한이 신의주를 특별행정구로 지정함에 따라 신의주가 중국의 선전과 비교되고 있다.
선전은 중국 정부가 경제특별개발구로 지정한후 불과 20년 만에 작은 어촌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빌딩이 숲을 이루는 현대화로 변모했다.
한편 신의주가 특별행정구로 지정된것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제안에 의해 추진됐다.두 차례의 중국방문을 통해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것으로 알려졌다
9월23일 북한 정부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신의주를 특별행정구로 지정하고 개방정책을 실행할 것임을 공식 발표했다.이날 북한측은 신의주 특별행정구에 관한 ‘신문광고’를 처음으로 외신기자들에게 발포했다.북한측 대표단과 양빈의 고문들이 공동 제정한 ‘신문공고’는 외신기자들을 통해 순식간에 세계 각지에 전해졌다.
‘신문공고’전문은 다음과 같다.


신문공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령(政令)에 근거해 신의주시 및 그 주변지역을 특별행정구로 지정한다.특별행정구는 독립된 입법권과 사법권 및 행정관리권을 부여받으며,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관리체제와 경제체제를 시행하며 중앙정부는 이를 간섭하지 않는다.조선 최고인민회는 ‘신의주 특별행정구 기본법’을 제정했으며 네덜란드 국적의 중국인 양빈 선생을 특구 장관으로 임명하고 신의주 특별행정구 준비위원회 설립과 특별행정구 정부 설립을 수권했다.
북한 신의주 특별행정구는 동경 124.20도, 북위 40.10도 위치했으며 구역 내 면적은 132만 평방 킬로미터,신의주시와 대계도 연해지역이 포함된다.이 지역에 대형 선박 정착부두를 거설하고 이를 필두로 전면적인 대외개방 정책을 시행할 예정이다.
신의주의 발전목표는 동북아 지역의 고도로 발달한 경제중심지가 되며 동시에 첨단기술산업 항구가공업 유통업 금융업과 관광업을 지주산업으로 하는 국제화 지역으로 발돋움하는 것이다.
신의주 특별행정구는 고도로 자유화된 경제무역 체제를 시행하며 세계인의 출입국 및 화물유통과 자금의 자유로운 출입을 보장한다.세금특혜 정책을 통해 투자자들의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며 특별행정구 기본법이 규정한 투자자의 권익을 법적으로 보장한다.특구정책은 50년 간 변하지 않으며 50년 후 투자자를의 기존 이익은 여전히 조선 정부의 보호를 받는다.
신의주 특별행정구 정부는 문화 교육과 위생 등 분야의 전면적인 발전에 주력하며, 조선국가의 주권과 안전에 피해를 주지 않는 전제 아래서 세계 여러나라 투자자와 개발업자의 기존의 생활방식과 문화 생활습관을 존중하며 자유롭게 국제화된 창업과 생활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한다.특별행정구 정부는 행정사무 처리에서 높은 효율과 공정 공평 공개의 원칙을 지키고 청렴해야 하며 양호한 사회질서의 투자환경을 조성한다.세계 각국 상인과 현지주민은 법적으로 평등한 지위를 보유한다.
신의주 특별행정구의 설립과 건설은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유리할것이며,동북아 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유리할것이며 또한 세계의 평화와 안정에 유리할것이다.신의주특구의 경제번영은 주변지역 나아가 세계의 경제발전에도 중요한 기여를 할것이다.
세계 각지의 벗들과 투자자들이 신의주 특구에 투자 또는 상업활동에 종사하는 것을 환영하며 신의주의 번영과 아름다운 내일을 공동 개척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사회주의를 고수하고 주체사상을 숭상하는 국가에서 이처럼 큰 변화가 개방의 길을 걷다니”라면서 쩡즈모가 신문광고를 읽은 후 한마디 했다.
평양 취재에 참가했던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의 오넬이라고 부르는 영국인 기자는 후에 베이징에서 나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
“대단했습니다.생각지 못했어요.그런데 기본법 초안은 누가 작성한 것입니까?정말 대단해요!”
오후4시경,양빈은 협상단 성원인 마닝,둥롄파,왕뤄 그리고 유라시아그룹의 부총재 스쥔,볜서우제,리강등과 함께 평양인민문화궁정에 먼저 도착했다.보통강을 뒤에 두고 선3층짜리 회색빛 건물의 평양인민문화궁전은 북한이 장관급 회의를 개최하는 장소이다.양빈 대표단이 신의주 특구 문제와 관련해 북한측과 협상을 했던 곳도 바로 이 건물 안에서였다.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신의주 특별행정구 합의서 체결의식과 경축행사장도 바로 이곳으로 정해졌다.
5시정각, ‘기본합의서’체결의식이 먼저 2층 소회의실에서 거행됐다.양빈은 유라시아무역회사를,김용술은 북한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를 대표해 합의서에 각각 싸인했다.그 자리에는 양빈의 부인 판차오릉과 마닝, 왕뤄, 스쥔, 볜서우제, 저우샹, 리자화,제커(捷克),왕청구이 등과 북한측의 김용술,김동규,허명규 등이 참석했다.
5시30분,북한의 경제관료 출신 조창덕(赵昌德)부총리가 인민문화궁전 회의실에서 양빈등을 접견했다.
취재기자로 그 자리를 지켜봤던 쩡즈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양빈은 평소의 흰색 T셔츠 캐주얼을 벗고 검은색 양복을 갈아 입었으며 검은색 구두에 흰 양발을 맞춰 신었다.양빈과 그 수행인원들은 2,000여 만의 북한 인민들과 마찬가지로 빨간색의 수령 배지를 가슴에 달고 있었다.신의주가 아무리 철저한 자본수의를 실행한다고 해도 빨간색의 그 수령 배지는 이 곳이 여전히 사회주의 국가이며 주체사상을 지도방침으로 하는 북한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주고 있었다.”
저녁6시,양빈은 인민문화궁전 회의실에서 만찬회를 열고 북한정부 관리와 취재활동에 참가했던 내외신 기자들을 초대했다.장진광 중국신화통신사 평양지사의 수석기자와 인민일보 북한주재도 네덜란드로부터 찾아와 이 연회에 참석하였으며 부총리 조창덕의 옆에 앉았다. “양빈 부인은 붉은 색 정장차림으로 만찬회 석상에서 모습을 보였다.잘 가꿔진 그녀의 맑고 깨끗한 얼굴이 온갖 풍상고초를 겪으며 거칠어질대로 거칠어진 양빈의 검은 얼굴과 너무나 선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만찬회에서 양빈이 잔을 들어 축사를 했다.연회가 끝난 후 유라시아그룹의 수행인원들이 연회레 참석한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눠주었다.빨간 포장종이에는 묵직한 원단이 들어있었다. “북한 대표들의 한결 밝아지는 얼굴표정과 눈웃음이 그들이 이 선물에 얼마나 만족하는지 그대로 잘 보여주고 있었다.”
9월24일 신의주 특별행정구 장관 취임선서 의식이 평양 만수대 의사당에서 거행되기로 결정됐다.만수대 의사당은 평양시 중심에 위치했는데 보통강과 대동강의 바로 사이의 만수대 거리에 자리잡고 있었다.만수대 의사당은 북한 최고인민회의 소재지로서 국무행사와 외사 행사를 거행하는 곳이었다.
이번 취임선서 의식에 참석한 양빈의 법률고문 둥롄파 교수는 다음과 같이 회고 하였다.
“9월24일호후 5시경 우리는 양빈을 따라 만수대 의사당에 도착하여 귀빈실에서 잠간 휴식하였다.그때 북한 예빈관이 우리에게 취임식의 절차를 간단히 소개했다.정각6시 선서의식이 시작됐다.예빈관은 우리를 양빈, 마닝, 나, 리자화, 왕뤄,리강,스쥔,볜서우제 등 순으로 회의실로 안내했다.
조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윈원장 김영남은 이미 좌정하고 입장하는 우리들을 바라보고있었다.그 오른쪽으로 부위원장 양형섭(杨亨燮), 부위원장 김영대(金英大),비서실장 김윤화(金润华)및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들이 앉아 있었다.안내원의 안내대로 양빈 일행은 김영남 위원장 및 기타 위원들과 차례로 악수를 하고 김영남위원장의 좌측에 나란히 줄지어 섰다.”
예빈관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신의주 특별행정구 장관 취임선서 의식 시작을 선포했다.먼저 조선 최고인민회의 위원장 김영남께서 신의주 특별행정구 장관에게 임명서를 수여함.김영남위원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북한 정부의 정령(政令)을 발표하고 북한 최고인민회의는 양빈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특병행정구 장관으로 임명함을 공식 발표,양빈에게 임명서와 특구 장관 직무 증서를 발급했다.
양빈은 임명서와 직무증명서를 옆에 있던 통역 김호에게 넘겨주고 김영남의 맞은 편으로 걸어가 마이크를 잡고 취임선서를 시작했다.




2002년9월24일 양형섭 북한 최고인민회의 위원회 부위원장 신의주 특구 장관에 임명된 양빈과 축하의 악수를 하고 있다.

조창덕 북한 부총리가 문화궁전 회의실에서 양빈 등을 접견하고 있다.사진은 조창덕 부총리가 마닝과 악수하는 장면.
“저는 선서합니다.죽는 한이 있더라도 장군님을 따를 것이며,어떤 큰 시련이 덮친다 해도 장군님의 아들과 전사가 되겠습니다.저의 자손만대는 조선과 생사존망을 같이 하겠습니다.”
선사가 끝나자 양빈은 북한 최고인민회의 위원장,부위원장,상임위원들과 차례로 악수했다.
의식은 20분밖에 걸리지 않았을 정도로 예상외로 간단했다.꽃다발로 화려하게 장식된 거대한 김정일 초상화 앞에서 모두들 기념사진을 찍었다.그것으로 신의주 특구 장관 취임의식이 전부 끝난 셈이었다.
선서취임 의식이 끝난후 북한측에서 소규모의 연화를 베풀었다.양빈을 제외하고 마닝,왕뤄,둥롄파 그리고 양형섭 등 북한의 고위급 지도자들 합쳐 겨우 10명 미만이었다.
양형섭부위원장의 축하언 발언에서 신의주를 번화 도시、우호 도시、평화도시로 건설하기를 희망한다고 하였다 .그후 마녕씨가 필자와 얘기를 이렇게 하셨다. :“우
리가 알고 있기는 양형섭 부위원장님이 얘기한것은 바로 신의주에 대한 조선정부의 정식정의이다:번화한 도시------국내의 정치 각도에서 출발하여 신의주를 국내경제 복흥과 개혁개방사업을 위해 공헌을 하라는것이다.:우호 도시------중국과 조선우의 각도에서 출발하여 신의주를 중조우의적인 상호관계를 맺는것을 상징한다.평화한 도시-----신의주의 발전과 번창은 조선반도의 안정과 동북아의 평화에 유리하다는것이다.
9월25일 양빈과 그 일행은 예정대로 전용기를 타고 선양에 돌아왔다.
이로써 양빈 신화는 막을 내리기 직전에 희극적인 클라이맥스를 출연했다.


주소:홍콩 구룡대각 해휘로18호 일호 은해6단지 18층 C동 방문: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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