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양빈의 ‘가택연금’前後
특구장관의 실수
9월24일 세계적인 텔레비전방송 및 신문들이 북한이 신의주를 특구로 지정했다는 소식과 함께 ‘기본법’을 발표했다는 폭팔적인 뉴스를 일제히 보도했다.
외국 통신사들의 신의주 특구에 관한 보도와 단둥에 모여든 내외신 기자들의 끈질긴 추적은 선양에 도착한 양빈을 극도로 흥분시켰다.
내가 북한으로 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단둥에서 부랴부랴 선양의 네덜란드촌에 돌아온것은 9월25일 점심 무렵이었다.
네덜란드촌 양빈의 별장에 도착해보니 이미 찾아온 손님들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양빈은 접견실의 큰 소파에 앉아있었다.악어브랜드의 힌 T셔츠에 연한 흙 색깔의 캐주얼 바지를 입은 늘 보아오던 익숙한 차림새였다.얼굴은 흥분과 희열로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으며 찾아온 손님들을 접대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양빈은 내가 접견실에 들어서는 것을 보더니 한마디 물었다.
“관선생님,평양에 가시지 못한 일이 어찌된 것입니까?”
뭐라고 대답할수 없었다.그 사이 있었던 일을 한 두 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웠다.그래서 그냥 웃기만 하면서 소파에 앉아 있던 한 친구가 내여주는 자리에 앉아 담배를 붙여 물었다.
양빈이 특구 장관이 되었다고 모두들 축하의 인사말을 하느라 꽤나 북새통이었다.담배를 피우며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축하하러,혹은 신의주에서 새로운 발전의 기회를 찾아보겠다며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아왔다.
그날 밤,양빈은 네덜란드촌 백조의 호수 열대우림의 유리온실대청에서 만찬회를 열었다.항상 그랬던 것처럼 그 날도 나는 둥그런 식탁에서 양빈의 바로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양빈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텔레비전 트라마 “갈망”에서 나오는 주제가를 불렀다.
양빈이 환영만찬회에서 드라마 ‘갈망’의 주제가 ‘머나먼 세월’을 부르는 모습
머나먼 세월 정말 곤혹했었다
정말인지,환각인지,갈피 못 잡겠다.
이별과 만남, 환희와 슬픔
모두 겪어보았다
그렇듯 집요한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옳은지 그른지를
누가 알려줄수 있으랴
마음 속의 갈망은
진지하게 살아가는 것
옳은지 그른자를
누가 알려줄 수 있으랴
………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감개와 무력함이 쉰 목소리를 통해 전해졌다.내마음은 그에 대한 동정으로 서서히 차오리기 시작했다.벌써 몇 개월인가.양빈의 전기를 쓰기 위해 그와 함께 그림자처럼 붙어다닌 나는 이젠 양빈이라는 사람을 너무나 잘안다.
이른 아침 양빈이 운전하는 지프차에 앉아 단 둘이 공사현장을 돌아보기도 했고,양빈이 수하 인원들에게 화내는 모습도 보았고,시공업체 책임자들에게 간곡하게 애원하는 모습도 보았다.
양빈을 동행에 평양에 오가면서 신의주특구에 관한 어렵고 어려운 협상의 과정도 함께 겪었고, 평양에서 같이 하이테크농업시범구 건설현장도 다녀 보았고, 국내의 언론의 질타를 받으면서 분노의 불안에 떨던 양빈의 모습,유라시아농업의 주가가 내리막을 치달을 떄 양빈의 실의와 초조함도 옆에서 조용히 지켜봤다.
양빈에게는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았다.그때면 전화를 걸어 나를 꿈속에서 깨웠고 차를 파견해 별장까지 부르군 했다.답답한 마음을 그렇게 해서라도 내게 털어놓으면 조금이나마 시원해서 그랬는지 모른다.그럴때면 운전기사 선랑만이 조용히 옆에서 있을뿐이었다.그가 호화롭고 사치한 생활을 할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의 하루 생활비는 100위안(한화 약 1만5천원)정도이다.하루 식사는 두끼,밥 한공기에 반찬 두 세가지면 된다.메뉴도 바뀌는 경우가 거의 없다.돼지고기 조림이나 야채복음,돼지고기에 두부볶음,거기에 더한다면 배추와 고기완자를 함께 넣어 끓인 국이 있을 뿐이다.
양빈은 해산물 요리는 별로 즐기지 않았다.한가지 비싼 반찬이있는데 광둥요리에 속하는 한근에 20위안 하는 생선찜이다.모든 것이 이것뿐이다.다른 취미나 지출이 따로 없는 대신 양빈은 담배를 많이 피웠다. ‘스리파이브’표 담배를 피우는데 하루 보통 4갑내지 5갑 정도였다.수입 억 위안의 자산을 갖고 있는 가족식기업가의 생활이 고작 이 정도란 말인가?
왠지 모르게 나는 밤에 그와 단 둘이 이야기하는 것이 두려워졌다.깊은 밤 그와 단 둘이 얘기를 나두다 그에 대한 연민이 내 마음에 차오르는 것을 나로서도 어쩔수 없었기 때문이다.낮에 사람들 앞에 나서는 양빈은 억만장자로 세상에 둘도 없는 장자의 모습이지만,밤이면 그는 명실상부한 고독한 존재라는 사실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양빈의 고민을 들으면 나는 몇 번이고 허심탄회하게 진심어린 충고를 해본 적이 있다.충인은 귀에 거슬리는 법이었다.내 말 따위에 귀를 기울일 양빈이 아니었다.그때문에 나 역시 자신에게 얼마나 되물었는지 모른다.
“양빈이 정말 아두(阿斗)인가?”
이런 내 느낌을 가깝게 지내는 몇 사람에게 얘기했더니 모두들 내가 부질없는 걱정을 한다고 했다.
“관선생님,양빈은 기인이고 총명해요.그가 남의 말을 안 듣는것 같지만 시비는 분명한 사람이지요.갈 길을 분명히 아는 사람입니다.”
친구들의 말에 반신반의할 뿐이다.
9월26일 오전,내외신 기자들이 양빈을 인터뷰하기 위해 선양으로 몰려들었다.볜서우제 혼자 기자들을 접대하기 어려웠으므로 내가 그를 돕게 됐다.
26일 오후,네덜란드 여왕 왕국 즉 유라시아그룹 양빈의 집무실3층에는 일본과 한국,미국,홍콩 등의 기자수십명이 대기하고있었다.접견실과 회의실 두 칸도 이미 사람들로 붐비었다.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나는 3층으로 올라갔다.그러나 말 못할 불안감은 떨쳐버릴수 없었다.양빈의 보좌관인 볜서우제의 사무실에 들어서니 소파에는 2,3명의 한국기자가 앉아 양빈과 단독 인터뷰가 언제쯤 가능하냐고 볜서우제에게 묻는 중이었다.
볜서우제는 내가 들어서는 것을 보더니 큰 짐을 벗어버린듯 반갑게 맞았다.
“관선생님,어서 오세요. 좀 도와주세요.”
한국 기자들을 돌려보내고 돌아서면서 볜서우제가 27일 오전 기자회견을 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되나?”
나는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개의치 말아요.양총재님이 정했어요.관선생님이 대변인을 말으시면 제가 사회를 하겠습니다.기자회견 행사장 표어는 어떻게 쓸까요?”
그러나 볜세우제가 내게 건네주는 종이를 보니 표어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조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신의주 특별행정구 행정장관 신문발표회 ’였다.
그 표어를 보는 순간 식은땀이 쭉 났다.어찌 이럴수가 있단 말인가?
볜서우제는 일본에서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후 선양의 크지 않은 부동산 회사에서 부사장으로 일했다.그 회사가 유라시아그룹 소속의 부동산회사와 합자했다가 자본철수를 하는 바람에 볜서우저는 유라시아그룹에 오게 됐다.언론 경력과 경험이 전혀없는 그가 유라시아그룹의 대외 홍보와 기획을 담당하고 있었으니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아뿔싸,이러면 큰 일 나는데!”
내 불안감은 걱정으로 번져갔다.양빈은 이미 외국 정부 관원의 신분이나 다른 국가에서 기자회견을 가지려면 우선 주권국가 관계부문의 허가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동변호사 왔나요?”
나의 물음에 그가 대답했다.
“곧 도착입니다.”
나는 양빈의 전기를 쓰는 작가이므로 고작 손님에 불과했다.유라시아그룹의 관리층이 아니었으므로 이 일의 가능성 여부를 여타 부타 관여할 수 없었다.그래서 둥롄파 변호사와 함께 법적 절차를 통해 이 문제를 타당하게 처리할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려했던 것이다.
둥롄파는 양빈이 초빙한 법률고문이었다.신의주 기본법 초안 작성자의 한 사람이었으므로 유리시아그룹에서 그의 말이라면 위력이 있었다.
둥변호사의 생각도 나와 일치했다.둥변호사와 논의해 기자회견행사장 표어를 ‘신의주 특구 장관 신문발표회’로 바꾸었다.
표어를 바꾸기는 했지만 나와 둥롄파의 불안은 가실 줄 몰랐다.
볜서우제는 수하 인원에게 그대로 절계해 기자회견장에 걸라고 지시했다.
나와 둥롄파는 이어 세계 각 언론사에서 발송해온 팩스를 읽으며 기자들의 각종 질문과 양빈이 평양 기자회견에서 했던 말들을 저일해 답변자료를 작성했다.27일 오후4시에 개최된 신문발표회에서 우리의 노력과 성의가 담긴 그 답변자료를 양빈은 사용하지 않았다.
27일오후 4시,네덜란드촌의 암스테르담 기차역 4층의 오른쪽흩에는 세계 각국 기자 수십명이 운집했으며 국내 매체의 기자도 적지않았다.
유라시아그룹의 부총재 리강,필자와 둥롄파 및 양빈의 정치고문 웡융시의 반대로 양빈은 결국 신의주 특구 장관의 명의로 신문발표회를 하지 않는데 동의하고 발표회장에 원래 붙였던 표어를 붉은 천으로 덮어버렸다.
나는 양빈과 함께 발표회장에 들어갔다.볜서우제와 양빈은 나란히 앉아서 회의실에 가득 앉은 기자들을 마주하였다.나는 일부러 양빈과 두자리 떨어진 곳에 혼자 앉아 기록만 하였다.
볜서우제가 사회를 했다.그에게는 양빈과 기자들이 자유롭게 대화할수 있게끔 진행하라는 뜻이 이미 전달되었다.
2002년9월27일,네들란드촌 신문발표회의에서, 왼쪽부터 관산、중간에는 양빈、오른쪽에는 볜서우제이다.
양빈:여러분이 아시다시피 3일전 평양에서 저는 조선 최고인민회의로부터 신의주 특별행정구 장관에 임명됐다.특구 장관을 담임하는 것은 나의 다년간 추구해 온 꿈이다.이는 조선 인민에 대한 동정심에서였다.그들은 너무 빈궁하다.나는 고아 출신이며 어릴때 빈궁하게 살아온 사람이다.지금 나에게는 많은 돈이 있다.나에게는 돈이 중요한것이 아니다.나는 평화를 갈망하며 동북아 지역의 평화와 발전을 갈망한다.나는 네덜란드 국적 중국인으로서 현재 신의주 특구의 수뇌가 됐다.나는 개인 이익을 추구하기 위히서가 아니다.봉급을 받는 관리에 불과하다.나는 조선인민을 도와 그들이 행복한 생활을 누리게 하겠다.
많은 기자들이 저를 단독 인터뷰하고자 하지만 이렇게 많은 기자들 제가 일일이 만날수 없기 때문에 이 브리핑 기회를 마련하였다.
기자:나는 21세기 경제보도 기자이다.신의주 특구에 대해 자세히 소개한다면?
양빈:신의주 특구는 완전히 자유로운 시회가 될 것이다.장래 특구의 민법, 형법등은 서구의 법률제도를 참조하고, 최대한 사람들의 자유권리를 보장해주며 사유재산을 보장하고 50년간 변함없는 정책을 시행한다.선진국과 같은 시장경제 정책을 시행하며 인국의 자유로운 유동과 무비자 출입 그리고 물류 면세와 세계 화폐의 자유로운 출입을 허용하겠다.
기자:나는 한국 조선일보 기자 여시동(吕始东)이다.신의주 특구에서 한국인이 대우는 기타 국가 국민과 같은가?
양빈:신의주의 법률은 누구에게나 일률적으로 평등한 법률이다.한국인은 언어적 우위가 있다.당신들 선조의 땅이 아닌가!특구는 20만~30만 명의 인력이 필요하다.주로 북한 인력을 쓸것이다.한국은 신의주 특구 최대의 투자자가 될것이다.한국기업가와 은행가들의 신의주 특구 투자를 환영한다.
기자:나는 홍콩 문회보 기자이다.유라시아농업이 26일 홍콩증시에서 거래가 중지됐는데 당신이 신의주에 가서 특구 수뇌가 되면 유라시아농업은 어떻게 할것인가?
양빈:좋은 방법이 있다.유라시아농업은 내가 10년 동안 쏟아 부은 심혈이고 내 자식같은 것이므로 꼭 좋은 방법으로 해결할것이니 주주들에게 그렇게 전해달라.
기자:나는 일본 교토사 기자이다.신의주 특구의 무비자 출입은 언제부터 시작되며, 특구 정부의 경제정책은 무엇인가?
양빈:모레30일부터 시작된다.신의주특구는 현제 세계에서 가장 좋은 특혜정책을 가진 자유로운 무역구가 될것이며 수출입면세구가 될것이다.피부색과 국적 차별이 없이 누구나 신의주에 투자할수 있다.소득세는 14%로 책정하겠다.현재 홍콩은 15%,중국은 30%,네덜란드는 40%이다.이는 법률의 공정을 요구한다.나는 네덜란드 국적이다.네덜란드의 법률이 공정함을 강조하고 싶다.그러므로 신의주 특구 법관은 유럽인을 임명하고, 경찰국장은 중국인도 북한인도 아닌 외국인을 임명하겠다.오직 완전히 공평한 사회가 만들어져야 돈을 벌수 있다.
기자:나는 재정시보 기자이다.신의주 투자계획과 규모,시간표를 소개한다면?
양빈:5년내에 기본적인 규모를 형성하고 10년내에 동북아 지역의 현대화한 아룸다운 도시로 만들겠다.기초시설 건설에 1,000억달러,총 토자규모는 4,000억 달러에 달한것이다.나 개인은 신의주 특구에서 봉급을 받는 장관이다.그러므로 상업직무를 포함된 대부분 직무를 사임하겠다.신의주에서 나 개인은 경영활동에 종사할수 없다.내가 3권을 장악하고 있기 떄문에 투자를 하지 않겠다.대신 모든 젊은이들이 창업했으면 좋겠다.24일 평양에서 BBC와 인터뷰를 하면서 나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특구 장관이라고 말했다.둥젠화 홍콩 장관은 100억 홍콩달러가 있은 후에 관원이 됐지만 나는 맨 손으로 신의주에 간다.
기자:나는 한국기자이다.한국방문 계획은 있나?
양빈:신의주에 한국공업단지를 건설할 계획이기 떄문에 10월7일 한국을 방문해 기업인들을 만날 예정이다.비록 외국이 설계하지만 한국인들의 민족습관을 존중하기 위해 한국 기업인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다.
기자:어떤 신분으로 가나?
양빈:이중신분이다.
기자:나는 일본기자이다.일본 방문계획은 있나?
양빈:빠른 시일내에 일본에 갈 계획이다.일본은 인건비가 높고 자연자원이 부족한 나라다.이에 비해 중국이나 조선은 인건비가 매우 낮다.따라서 조선의 개방은 중국과 일본의 교류를 촉진할것이며 동북아는 가장 발전 전망이 있는 지역이 될것이다.신의주에서 일본까지 매우 가까운 거리이며 해저터널을 이용할수도 있다.우리는 평화와 발전의 방식으로 동북아 경제 공동권을 행성해야 한다.이는 일본,중국 및 조선과 한국이 공동 노력해야할 바이다.
기자:나는 홍콩 경제일보 기자이다.당신의 권력은 얼마나 큰가?
양빈:신의주 특구 장관으로 군사와 외교를 제외한 모든것은 특구 자체에서 책임진다.이를 테면 재판권 종심권이 그것이다.
기자:나는 요미우리 신문기자이다.중국 정부와 랴오닝성,단둥시 정부의 도움을 기대하나?
양빈:조선이 나를 신의주 특구 장관으로 임명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내가 네덜란드 국적의 중국인이기 때문이다.중국과 조선은 피로 맺어진 친선관계이다.신의주 개방은 랴오닝성과 단둥시 경제발전에 도움이 된다.중국 외교부 대변인도 조선의 신의주 특구지정에 환영과 지지를 표시한 바가 있다.
기자:나는 재경신문 기자이다.선양 유라시아그룹의 많은 기업은 어떻게 처리하나?국토자원부가 이미 사람을 파견해 네덜란드촌의 부동산 문제를 조사하고 있는데 전망은 어떤가?
양빈:위탁관리를 하겠다.내 개인적으로 경영에 참여하지 않고 CEO를 초빙해 위탁관리를 하겠다.나는 이미 신의주 특구의 관리이기 떄문에 상업활동에 종사할수 없다.네덜란드촌의 토지는 아무 문제가 없다.오래 전의 얘기다.어떤 기자들은 8개월 동안이나 이를 거론하고 있다.당신들이 직접 랴오닝 국토국에 가서 검사해보기 바란다.
기자:나는 한국기자이다.김정일 장군을 어떻게 알았니?
양빈:김정일 장군이 나를 믿는 것은 내가 조선인민을 이해하기 때문이다.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중국 인민지원군을 통해 애국주의 국제주의 교육을 받았다.나는 장강(长江)강가에서 자라면서 어려서부터 압록강 맞은편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북한의 어려움을 깊이 이해하고 그들의 민족과 인품을 이해한다.일부 나라들이 말하는 것과 다르다.현재 어려움이 있지만 그것은 주로 미국의 경제적 제재 때문에 조성된 것이다.김장군은 132평방킬로미터의 땅을 내게 주어 건설하게 했다.내 짐이 무겁다.
기자:홍콩상보 기자 서신(徐迅)이다.김정일이 당신을 믿고 이해하는 이유를 자세히 소개한다면?
양빈:세가지이다.첫째,믿음이다.1년간 내 소박한 마음을 조선에 전했고 50년 전에 희생된 수십만 명의 중국지원군 열사들의 무덤을 찾아보면서 그들이 무엇 때문에 희생되었는지를 생각했다.그들은 조국을 보위하고 조선 인민을 위해 성묘마저 자유롭게 못다니고 있다.그러므로 오직 개방돼야만 중국인들이 자유롭게 다닐수 있다.
둘째,조선에서 답사하는 동안 조선 인민은 착하고 소박하면 근면한 민족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그러나 조선의 농업발전은 매우 낙후하다.내가 가진 지혜와 사심없는 마음으로 조선의 농업발전을 돕기 위해 자문과 지도를 제공하였으므로 내게 정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셋째,조선은 나진과 선봉 무역구를 만들었지만 모두 실패했다.개방을 원하는 조선은 외국인을 초빙해 특구건설을 하기로 했다.나는 네덜란드 국적의 중국인이다.특수한 역사시기에 나처럼 특수한 인물을 선택하게 된것이다.
기자:132평방 킬로미터 면적의 신의주 특구 건설계획과 변경무역 전망은 어떠한가?
양빈:신의주 특구는 신의주시와 대계도 연해지역을 포함한다.이 지역에 대형 선박이 정박할 부두를 건설하고 이를 필두로 전면적인 개방을 실행할 것이다.그 발전 목표는 동북아 지역에서 고도로 발달한 경제중심으로 건설하는 것이다.첨단기술산업,금융업,가공업,관광업등을 골간산업으로 하는 국제화 구역을 만들겠다.특구는 많은 특혜정책을 시행할것 이다.예를 들면 금융 방면에서 스위스의 경험을 흡수,자유로운 유동이 가능하다.증권거래가 있어 중국 중소기업의 융자에 유리할것이다.
기자:나는 한국 기자이다.9월30일부터 특구를 자유롭게 출입할수 있나?
양빈:9월30일이후 당신의 여권을 가지고 자유롭게 출입할수 있다.단둥에서 출발한다.어느 나라 여권이든 무 비자로 신의주를 출입할수 있다.
양빈의 이 말이 떨어지자 자리에 있던 기자들 특히 한국과 일본기자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해 들썩거렸다.
이는 양빈의 실수였다.9월30일이후부터 신의주 무비자 출입이 가능하다는 소식이 급기야 세계에 알려졌기 때문이다.그러나 9월30일이 되어서도 외국인은 신의주에 마음대로 출입할수 없었다.북한 정부는 한국 기자들의 입국을 거부했다.이는 외국기자들의 불만을 야기했고 특히 한국기자들이 반발이 컸으며 앞다퉈 이에 관한 보도를 했다.여론은 ‘양빈의 정치경험이 부족하다’, ‘특구장관의 수준이 낮다’는 등 식으로 평가했다.
사실 양빈은 벙어리 냉가슴 앓을 수밖에 없었다.북한 대표단의 한 관리가 분명 9월30일이후부터 외국인의 신의주 무비자 출입을 허용할 것이라고 양빈에게 말했던 것이다.그러나 양빈이 이 소식을 대외에 발표하자 북한 외무성과 북한 당국도 반대해 나섰다.양빈은 중국이 대만 동포를 대하는 방법을 모델로 배워 남북한의 교류를 촉진할 생각이었으나 그것도 된서리를 맞게 됐다.
외신 기자들 중에 특히 다년간 북한 땅을 밟아 보고 싶어하는 일본기자와 한국 기자들은 양빈을 잡고 놓지 않았다.양빈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대꾸할 힘도 없어 그냥 사과를 할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이점에서 양빈은 진심이었고 어쩌면 무력했다.
신의주특구준비위원회 제1차회의
9월27일과 28일 양빈 대표단 성원들이 전국 각지에서 네덜란드촌에 모여들었다.나는 줄곧 네덜란드촌에 머물고 있었다.
9월29일오전 9시,우리는 네덜란드 여왕궁전---유라시아그룹 총본부 대청에 잇따라 들어섰다.2층 대청 및 회의실은 국내외 기자들로 북적이었다.나와 둥롄파,왕뤄등은 사람들틈을 비비고 가는데 안면 있는 외국 기자들이 내게 아는체 하며 무슨 소식이 없냐고 물었다.나는 머리를 흔들며 가볍게 사절했다.우리가 3층 양빈의 사무실을 지나 4층 회의실에 이르러 잠깐 쥐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도 잇따라 들어섰다.
양빈이 회의 사회를 봤다.그의 앞에는 연설 원고가 놓여져 있었다.두 폐이지 분량이었는데 아마 웡융시가 작성한것 같았다.
양빈이 회의 탁자 정면에 앉았고 오른쪽으로 마낭,웡융시,리수,왼쪽으로 동롄파와 나 그리고 왕뤄,홍콩의 리잉저우 변호사가 등이 있었다.양빈의 바로 맞은 편에 저우광성이 앉았다.
차오성리는 병원에 입원해 수술치료를 받고 있었으므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그런데 북한과의 협상에 줄곧 참여해 왔던 마카오대학 법학원의 뤄웨이젠 교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그리고 보니 그가 회의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지 한참 되는것 같았다.물론 그 정확한 이유를 나로서는 알수 없었다.
회의가 열리기 전에 양빈이 리잉저우 변호사에게 ‘저 개인이 유라시아농업의 주식을 전부 사들일수 있습니까?’하고 물었다.리잉저우 변호사는 “가능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양빈이 왜 이걸 물어볼까?우리는 이미 양빈이 10월중. 하순쯤에 10억위안의 자금을 조달받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미 협상이 끝난 것이었다.그 자금으로 유라시아농업의 주식을 사들이고 네덜란드촌의 밀린 채무를 청산,건설공사도 회복할 생각이었다.그중 일부분은 신의주 특구의 초기 건설자금으로도 사용할 계획이었다.
양빈이 입을 열어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했다.
오늘 우리는 신의주 특구 준비위원회 제1차 회의를 개최한다.
2002년9월24일,평양에서 진행하는 특구장관 인명식 전 동련발과 양빈씨가 만수대의사당
나는 선장이며,선장은 오직 김장군이 선택한 나 하나 뿐이다.회의는 주로 조직구도를 연구하고 오늘 끝내려 하니 모두의 지혜를 모았으면 한다.
나는 정치를 해본 적이 없다.여러분의 도움을 바란다.먼저 우리의 원칙을 말하겠다.
첫짜,북한을 사랑해야 한다.북한이 없으면 신의주 특구가 없을 것이므로 중국과 북한 양국 인민을 평등하게 대우해야 한다.
둘째,김장군님을 열애해야 한다.지난 수십년 동안 북한은 폐쇄적인 역사를 이어왔다.대외의 거대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견지해오기가 쉽지 않다.
셋째,반드시 능률적이고 청렴한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
기회라는 것은 사람의 일생에서 단 한 두 번 밖에 없다.전하는 모두의 것이지 나 혼자의 것이 아니다.북한은 가난하지만 그 곳의 인민은 어떤 고난도 이겨내며 근검절약의 미풍을 가진 민족이다.신의주에서 여러분의 생명에 위험이 없을 것 임을 보증한다.개인의 작은 이익을 버리고 대의를 취하기 바란다.
신의주 특구를 위해 유라시아농업 상장 회사를 포함한 나 개인의 손실을 따지지 않겠다.네덜란드촌도 위탁관리를 하겠다.아내가 반대한다면 이혼할수도 있다.평생 각은 이익에 연연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4월선양에서 주기로 한 6억위안의 대부금을 안 주겠다고 할 뿐만 아니라 이미 받은 대출까지 회수하려 하지만 나는 오늘까지 버텨오고 있다.정말 쉽지않다.앞으로 어떤 난관이 있어도 이를 악물고 버틸것이다.
특구의 이익과 관리의 직무는 결합할 것이다.앞으로 회의를 개최하면 반드시 기록을 할것이며 추진상황을 체크할 것이다.
지금 세계적으로 많은 정치가들이 신의주 특구를 연구하고 있다.냉전이 끝났다는 또 다른 표징이라고 생각한다.
미래의 경제는 지역졍제이다.동북아는 세계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발전속도가 가장 빠른 지역이 될것이다.
특구정부는 정예화해야 한다.안면 때문에 친척이나 무능한 자를 선발하지 않겠다.내 친척은 특구 정부에 지금도 앞으로도 단 한명도 받아들이지 않겠다.친구로 말하면 믿음과 덕을 중히 여김이 첫째이고,재능은 둘째이다.셋쨰는 청렴이다.탐오는 절대 용서하지 못한다.우리는 시작부터,최고위층부터 청렴해야 한다.특권을 이용해 탐오하는 것을 절대 허용치 않겠다.이 자리에 앉은 누가 법을 어겼다면 나는 그를 구해줄수 있으며 심지어 특구 장관의 직권을 이용해서 특사할수도 있겠지만 만약 탐오했다면 이 양빈은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넷째는 원칙이다.중국의 국가 이익과 중국인민의 이익을 수호한다.중국은 내 본가이고 조선은 처가라고 할수 있다.잘 산다고 해서 본가를 잊어서는 안된다.중국에 미안한 일을 해서는 절대 안된다.중국정부와의 문제는 합리적으로 해결하겠다.누구도 이 원칙을 위반해서는 안된다.이점은 공무원 준칙에 써 넣겠다.
규칙,특구 정부는 반드시 자체의 게임규칙이 있어야 한다.
의사규칙.중대한 정책결정은 특구 장관이 회의를 소집해 논의한후 결정하며 장관의 싸인이 있어야 효률을 발생한다.중대한 인사변동은 장관회의에서 결정한다.
권력 수여의 원칙 행정장관 산하에는 부문장관을 두고 하급 전권제(专权制)를 시행한다.특구의 양호한 이미지를 위해 우수한 청년을 공무원으로 선발한다.권력 수여는 특구 장관이 서면형식의 증명서를 발급하며 엄격한 자료기록 제도를 건립하고 이체는 법률을 근거로 삼는다.다섯번째는 기구의 설치 이다. “작은 정부,큰 사회”를 구현한다.특구 정부는 완전히 자유로운 자본주의 제도이다.우리의 정부는 인민을 위해 일한다.인민을 위해 봉사하는 정부이며 인민이 들어갈수 있는 곳이다.특구 구(区)급 정부는 정책결정에 참여하지 않으며 그 임무는 인민을 위해 봉사하는 것뿐이다.다른 연구를 할 필요가 없으며 다만 지령을 분담해 실행함으로써 진정으로 인민을 위해 봉사하는 정부가 되는 것이다.
선진국 정부를 모델로 배워야 한다. 꼭 서양의 가장 좋은 것들을 도입하겠다.김장군님은 ‘모든것은 양빈이 결정하며,아무도 그것을 개변시켜서는 안된다’고 지시하셨으나 이점에 대해 여러분은 믿어도 좋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회를 만들기 위해 세계에서 가장 좋은 법률과 제도를 도입하고 가장 우수한 인재를 영입하겠다.10년후 여러분이 심혈을 들여 건설한 특구가 빌딩이 숲을 이루고 등불이 찬란한 곳으로 변모한다면 여러분들도 가슴이 뿌듯할 것이다.
나는 특구 장관이지만 집단의 지혜에 복종하겠다.여러분의 지혜를 소화발전 발휘할수있다. 내게는 부족한 점이 많지만 한가지 장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여러분이 의견을 받아들일줄 아는 것이다.이런 사람이 가장 무섭다.원래도 둔한 데다가 주견이나 칩착이 강한 남의 의견은 도무지 들을려고 하지 않고 타인의 지혜를 흡수할줄 모르는 그런것이 가장 무서운 것이다.
특구 정부는 민주 정치를 시행한다.신의주 특구는 사람마다 평등하다.장관이나 화장실 청소를 하는 인부나 동등한 인권을 가진다.
특구는 시장경제를 시행한다.우리는 모두 계획경제 시대를 겪어봤기 떄문에 여러분은 기업에 대한 정부의 간섭이 적은 지역일수록 경제가 발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특구의 정책결정층은 일부 지도자들이 직접 기업에 간섭하는 것처럼 그렇게 해서는 절대 안된다.이건 닭을 잡아 계란을 끄집어내는 거나 다름없다.
다음은 정부기구 설치이다.
사무청은 특구 장관 산하에서 사무처리하는 기구이다.그 아래는 또 비서처,인사처,홍보처,외사처,자료관리부서,행정,특허경영처등이 설치된다.
재정금육국:재정,금융,증권거래소 등을 책임진다.
세무국:미래의 대국(大局)에 관계되는 기구이며,특구 정부가 생존을 의탁하는 기구이다.산하에 세무경찰을 설치한다.
경제국:향후의 자본유치,경제사무,기업등록,기업관리 등을 책임진다.
특별업종 관리국:전력,정보통신,도박등 업종을 책임진다.
토지기획국:토지,도시기획,설계,경매 등을 관리한다.
공공사업국:물,전기,공공사업,석탄가스,난방공급 등 대주의 생활과 밀접히 관계되는 모든 것을 책임진다.
위생국:약품,병원,방역 등의 관리를 책임진다.
교육국
교통국:육지,항공,해상 교통관리를 책임진다.
이민국:출입국 관리를 책임진다.
세관국
경찰국
검찰원
특구 건설국
환경보호국
먼저 15개 국 1개 사무청을 설치하고 향후 필요하면 더 설치한다.
그리고 둥롄파를 입법회의 의장으로 임명한다.앞으로 입법회의를 통해 선거하겠지만 이번 임명은 조선측도 승인했다.
웡융시를 특구 장관 보좌관으로 임명할 것을 제의한다.
마닝을 특구 건설총회사 사장으로 임명하며 자본유치와 토지경매를 책임진다.오늘 저우쟨핑(周建平)이라고 하는 또 한명의 친구가 왔다.원래 상장회사 사장이었다.마닝 수하에서 조수로 일하게 된다.우리 모두의 밥 먹는 문제는 건설총회사에 달려있다.
회의 후 저우팡성,리수,왕후이둥은 나와 같이 좀 더 논의하기로 하자.
리변호사는 홍콩의 일을 그만두고 특구에 왔으면 좋겠다.리변호사는 미래 특구의 상장회사 문서작성과 구체적인 시행을 책임진다.
10월25일 특구 장관 취임식을 가질것이며 신의주의 압록강호텔을 임시 정부로 하고 그 곳에서 내각을 조직한다.
자본유치.10월은 건설계획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으므로 건설이 없다.하늘이 준 이 겨울기간을 이용해 자금유치에 나설수 있지 않는가.중국의 단둥, 선양, 광저우, 다롄,시안,충칭,상하이 등 지역에 자금유치 사무소를 설치하고 위탁제로 운영할 수 있다.또 일본의 도쿄,한국의 서울,미국의 동서부,홍콩,대만,동남아 등 지역에도 자금유치 사무소를 설립한 것이다.내달에 시행에 들어가며 마닝이 책임지고 추진한다.
10월2일 웡융시 선생님 마닝 선생님 나와 동행해 한국에 간다.김대중 대통령과 면담을 가질 것이며 한국에서 다시 일본으로 갈예정이다.
10월11일부터 13일까지 다시 열기를 올린다.
기획설계는 왕뤄가 책임지고 추진한다.빠른 시간 내에 기획설계 그룹을 구성하고 신의주에 먼저 가서 추진할 수 있다.기획설계가 없으면 부동산 거래를 할 수 없다.땅을 팔아야 우리가 살 수 있다.
나는 먼저 자금을 해결해 형제들에게 지급하겠다.여러분이 특구 때문에 몇 개월 동안 수고하면서 돈 한푼 못 받은 것을 다 알고 있다.이 몇 개월 동안 밀린 여러분의 임금을 지급하도록 하겠다.
웡융시 선생은 임금제도를 어떻게 제정할 것인지 연구하고 ,처음에는 높게 책정하지 말고 나중에 다시 올려주도록 하라고 하였다.그리고 특구 여권의 디자인과 인쇄를 빨리 하되 위조가 불가능해야 한다.국제사회와의 연락방식과 경찰 변방군인의 복장 디자인 그리고 연합교역소 설립 등에 대해 여러분들이 논의하도록 하자.
이상과 같은 요지의 말을 남긴 후 양빈은 웡융시에게 사회를 부탁했다.
“나는 또 아래에 내려가 외신기자들을 만나야 겠어요.그들도 조급하게 제 다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9월27일 신문발표회에서 그만 실수를 했어요.9월30일부터 비자 없이 신의주 입국이 가능하다고 했는데 조선 정부가 동의하지 않았으니 내가 나서서 설명을 해야겠어요.웡융시 선생이 사회를 맡아 계속 회의를 하십시오.”
양빈이 급히 회의실을 떠나 반발이 만만치 않은 외신기자들을 만나러 2층으로 내려갔다.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양빈은 외신기자들에게 거듭 사과를 표시하며 그가 정식 취임하면 모든 기자들의 신의주 출입을 자유롭게 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웡융시가 특구 장관 보좌관의 신분으로 계속 회의를 주최했다.
웡융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먼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만, 양총재가 저를 특구 장관보좌관으로 임명했지만 저는 다만 상급의 지시를 전달하는 막료이며 여러분을 위해 봉사할 뿐입니다.마닝은 네덜란드 국적이고 양총재와 동창입니다.또 처음부터 신의주 특구의 계획,협상등에 참여해왔습니다.양총재는 특구에서 그가 선장이고 마인은 부선장이라고 했어요.우리는 그들 두사람의 지도하에 일하는 것입니다.”
“저는 먼저 두 가지를 고려합니다.첫째는 돈이고 둘쨰는 사람입니다.모두들 반년 넘게 고생했는데 임금을 먼저 지급해야겠죠.돈이 없으면 준비위원회를 운영할수 없으니까 말입니다.양빈은 10월 중순에서 꼭 비용을 조달해야 합니다. 둘째,사람이라고 했는데 우리 조선어가 유창한 젊은 간부를 선발해야 합니다.지린이나 랴오닝 지역에서 모집할수 있습니다.”
웡융시의 말이 떨어지자 그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한 마디씩 말했다.
왕후이둥: “자리를 비우더라도 자질이 낮은 사람은 안 돼요.”
저우팡성: “둥원장님이 진짜 원장님이 되네요.특구 입법회의 의장 아닙니까.”
리수: “그건 특구 장관과 나란히 견줄수 있는 의회 의장 자리가 아닙니까.”
둥롄파: “이건 양회장이 그냥 말해보는 거지요.의장은 입법회에서 선거해야 합니다.지금은 함부로 말해선 아되요”
리수: “특구 장관 보좌관께서 특구의 인사배치를 말씀해주시죠!”
웡융시: “특구 장관 보좌관은 상급의 지시를 하달하는 막료일뿐입니다.양총재의 지시에 따라 둥원장님을 입법회의 의장으로 임명합니다.그리고 저우팡성씨는 재정세무국 국장,왕후이둥씨는 사무청 산하의 외사와 홍보를 담당하게 됩니다.왕뤄씨는 세관과 기획국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세요.”
저우팡성: “후이둥,자넨 그래도 사무청을 선택하는 것이 좋아.”
리수: “그래,사무청을 맡아요.”
웡융시: “여러분,10분만 휴식합시다.”
둥렌파는 왕뤄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그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아까 왜 기획국을 선택하지 않았습니까?”
왕뤄는 얼굴을 돌리며 내게 물었다.
“관선생님이 보기에 제가 뭘 하면 좋을 것 같아요?”
나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당연히 토지기획국이지.양빈도 이미 전부터 얘기를 했잖아요.근데 당신 왜 방금 말을 안하고 있었어요?”
왕뤄가 고지식하게 웃으며 말했다.
“여러 사람의 말을 듣고 결정하고 싶어서요.양회장님의 결정을 따르지요!”
잠시 쉬느라 흩어졌던 사람들이 다시 회의실에 모여 회의는 계속됐다.
웡융시: “여러분 다른 문제가 있나 논의해봅시다.돈에 관해서는 제가 직접 양회장님께 여쭙겠습니다.”
둥렌파: “차오성리는 어떻게 됩니까?”
웡융시: “특구 건설지휘를 맡게 될지 아직 확정되지 않았어요.”
둥롄파: “준비위원회 정식 회원은 누구입니까?”
웡융시: “양회장과 마닝,둥원장 그리고 나,저우팡성,왕뤄,왕후이둥,차오성리 이렇게 여덟 명입니다.”
왕뤄: “그럼 관선생님은 아닙니까?”
웡융시: “양회장이 얘기 안 했어요.”
이때 양빈이 마침 외신기자들과 회견을 끝내고 4층 회의실에 들어섰다.양빈이 자리에 앉으며 웡융시에게 물었다.
“인사배치는 기본적으로 결정됐습니까?”
웡융시: “저우팡성이 재정국을 맡기로 했어요.”
양빈: “좋아요.저우팡성이 재정을 관리한다면 나도 시름 놓을수 있어요.”
웡융: “왕후이둥은 대변인 겸 외사를 맡았어요.”
선양 네덜란드촌에서의 양빈과 왕후이둥
“어 외사를 겸했어요?”
양빈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그러나 양빈이ㅡ 뜻밖인 듯한 반응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그가 왕후이둥이 외사를 겸하게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사실 이는 마닝의 뜻이었다.왕후이둥이 미국 유학을 했고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인간성도 좋다며 대변인 직무를 맡아 외신기자들을 대처하게 하는 것이 좋다며 양빈에게 적극 추천했던 것이다.머리를 끄덕이긴 했지만 외사까지 겸할 줄은 양빈 자신도 몰랐던 것이다.그래서 왕융시로부터 그가 외사까지 책임진다는 말을 들었을 때 엉겁결에 “어?외사까지 겸했어요?”하는 말이 불쑥 나왔던 것이다.그리고 또 저우팡성이나 리수가 아무리 부추겨도,그리고 왕후이둥 자신이 사무청을 맡을 생각이 있다 해도 양빈은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날 웡융시와 장기를 두면서 이 일을 거론한 적이 있다.웡융시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사실 양빈은 사무청을 맡는 책임자로 이미 웡융시를 점찍어 놓고 있었다.
웡융시는 양빈에게 왕뤄에 대한 배치를 말하면서 항구설계와 토지기획국 두 가지 중 왕뤄가 아직 확정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양빈이 말했다.
“왕원장은 기획국을 책임지세요!”
양빈이 기왕 결정했으니 왕뤄도 다른 말을 더 하지 않고 “양회장의 뜻을 따르지요”라고 했다.
이렇게 되어 왕뤄가 특구 토지기획국국장으로 내정됐다.
이어 양빈이 얼굴을 리수에게 돌리며 말했다.
“리수씨,당신은 특구 정부 공무원보다 회사를 경영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리수는 두말 없이 흔쾌히 대답했다. “좋습니다.”
인사배치에 관한 얘기가 끝나자 양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러분,오늘 저와 함께 식사를 합시다.식사를 하면서 계속 논의하시죠.”
이로써 제1차 신의주 특구 준비위원회 회의가 끝났다.
우리 모두가 4층 회의실을 나오는데 내외신 기자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어 양빈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했고,카메라 셔터를 눌렀다.이때 우리를 대기하고 있던 차량들이 한대 한대 우리 앞까지 미끄러져 왔다.여럿은 각자 배치된 승용차에 몸을 실었다.광동 ‘남풍창’(南風窓)의 기자 웬팡(袁方)이 양빈을 막아서자 기타 외신기자들이 양빈을 에워싸려 했다.양빈은 할 수 없었던지 원팡을 자기 차내에 앉히고 질문에 대답하는 것 같았다.양빈은 원팡에게 제1차 신의주 특구 준비위원회 회의가 금방 열렸음을 일어주었지만 회의의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날 밤 ,선양의 꽤 유명한 북한음식점 사장이 양빈과 회의에 참석했던 우리 모두를 초대했다.음식점의 북한인 사장과 여성 종업원들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어 정말 축제분위기였다.
북적거리는 장내에서 빠져 화장실로 가는데 웡융시가 따라 나오며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말했다.
“양총재가 7일 한국으로 ,9일 일본을 갑니다.나와 마닝,저우샹이 동행하게; 됩니다.제가 관선생님도 함께 갈 것을 제의했습니다.양빈도 동의했어요.그러니 준비하세요.여권은 저우샹에게 주어 한국과 일본으로 가는 비자를 받도록 하세요.”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이튿날,저우샹이 나를 찾아와 여권을 달라고 했다.한국과 일본으로 가는 일행의 수속을 그가 맡아서 하기로 했다.
같은 시각,일본에서 우리 일행의 일본 입국수속을 위해 ‘아까호시 요시하루’사장은 일본 외무성의 관리들을 찾아다니고 있었다.그러나 아쉽게도 한국과 일본 방문은 이뤄지지 않았고 유감만 남기게 됐다.
아까호시,신의주 특구 일본대표부 대표 임명
9월30일 오전 10시,양빈은 신의주 특구 장관의 신분으로 그의 일본인 친구 아까호시를 회견했다.여기서 아까호시와 양빈이 만나게 된 경위를 소개하기로 하겠다.이들 두 사람의 만남은 우연하게 이뤄졌다.
2001년12월24일 아까호시 사장은 투자상담 때문에 광저우(廣州)에 오게 됐다.광저우 시장을 비롯해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상담을 하던 중 잠깐 휴식을 하게 됐는데 이 떄 홍콩의 한 친구가 아까호시 사장에게 중국의 제2부호이며 전도가 유망한 젊은이라며 양빈을 소개했다.
양빈이 신의주 특구 일본 총대표로 임명한 일본 중국창업투자주식회사 사장 아까호시
양빈이 아까호시 사장에게 신의주특구 일본 총대표 임명장을 수여하는 장면
전도가 유망한 젊은이라는 말에 양빈을 만나고 싶었던 아까호시 사장은 24일 상담이 끝나 25일 일본에 귀국한 후 26일 일본에서 양빈과 만나기로 했다.
양빈과의 만남에 대해 아까호시는 나중에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도가 유망한 젊은 경영인이라고 해서 관심을 가졌지요.저의 회사가 벤처투자 분야이고 또 일본에서 유일하게 공개 상장을 하지 않은 대중(對中)투자기업이나
까요.양빈이 전세기를 타고 일본에 왔더군요.양빈과의 만남은 사실 이렇게 간단해요.”
그럼 양빈은 무엇 때문에 일본에 가서 그와 만나자고 했을까?
“양빈은 화훼와 야채를 대 일본수출을 희망했습니다.당시 가족들과 함께 왔는데 가족들을 일본의 고급호텔 프레지던트 룸에 투숙시키고,양빈과 나 그리고 홍콩 친구 이렇게 세 사람은 열해(熱海)의 온천욕장에 갔습니다.양빈을 처음 봤을 때 향토적 정서가 다분하다는 인상이 강하게 느껴지더군요.정직하고 붙임성 좋은 사람이었어요.제가 하는 말을 조용히 들어주는 편이었는데 어쨌든 좋은 인상을 갖게 되었지요.”
양빈이 도쿄에 하루밖에 머물지 않았지만 아까호시 사장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두 사람은 그때부터 좋은 친구가 되었다.아까호시 사장이 말했다.
“양빈은 온천을 좋아했어요.이튿날에도 열해 최대의 호텔인百萬石 호텔의 온천에 갔는데 아마 온천이 너무 좋았던가 봐요.양빈이 갑자기 그 호텔을 매입하려면 돈이 얼마나 필요하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그래서 제가 이제 2,3년 후에 매입하는 것이 좋을 거라고 했지요.도쿄에서 하루 밤을 머물렀지만 두 사람은 서로 믿는 좋은 친구가 되었어요.양빈은 일본을 떠나면서 ‘꼭 선양에 오라’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3개월 후인 2002년3월8일,아까호시 사장이 선양에 왔다.유라시아그룹의 홍보실 주임인 저우샹이 공항에 마중 나갔다.정중한 예의를 갖추는 의미에서 양빈은 최신형의 백색 초대형 벤츠와 BMW를 한 대씩 공항에 파견했다.
고급 외제 승용차가 네덜란드촌에 미끄러지듯 들어서자 아까호시 사장은 네덜란드촌의 그 어마어마한 규모에 경악을 금치못했다.
양빈은 마냥 그러하듯 유라시아그룹의 본부이자 자신의 집무실인 네덜런드 여왕 왕궁에서 손님을 기다렸다.
당시 아까호시 사장과 동행한 사람은 일본에서 야채업에 종사하는 대기업 책임자였다.양빈이 화훼와 야채의 대일 수출에 관심을 가졌으므로 아까호시 사장이 양빈에게 소개시켜주려고 데리고 온 사람이었다.오래 지속된 엄무 상담이 끝나고 아까호시는 저우샹의 안내를 받으며 네덜란드촌을 둘러보았다.아까호시 사장은 확실히 네덜란드의 발달한 농업이 중국의 현대기업에 의해 중국땅에 옮겨지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그 엄청난 규모에 탁복했다.
“그날 밤 양빈은 네덜란드촌의 유리화원에서 성대한 환영만찬을 준비했어요.환영만찬에서 양빈은 아까호시 사장과 함께 노래를 부르자고 요청했는데 우리 일본인들로 말하면 쉽게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지요.그러한 마음 씀씀이가 양빈의 사업이 오늘과 같은 성공을 있게 한 것이라고 생각했어요.화원음식점은 새가 우짖고 꽃향기가 넘쳐나는 곳이었습니다.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은 무렵,양빈은 자체로 제작한 지도 한장을 꺼냈어요.아주 중요한 일을 우리에게 알려주겠다면서 중요한 일인만큼 아직 공식 발표를 하기 전에 꼭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북한이 신의주를 특별행정구로 지정하고,양빈이 특구 장관으로 임명된다는 것이었습니다.갑자기 접하는 소식이라 저는 한 순간 멍해졌습니다.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단둥과 마주하고 있는 곳이 바로 북한 땅이 아닌가.제 머리 속에는 중국의 특별행정구인 홍콩과 경제특구인 선전이 떠올랐습니다.신의주가 특별행정구가 되든 경제특구가 되든 그건 대단한 일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어요.그런데 북한이 여기까지 생각해낸 것이 아니가!
이어 양빈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부터 북한 해역에서의 어업권을 부여받았으니 앞으로 물고기를 잡으면 일본시장에 수출도 가능하다고 했습니다.특히 게,광어,복어 등을 많이 잡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그러면서 일본의 수산물 대기업과 합작할 생각이니 소개해달라고 했습니다.저는 그 자리에서 대답했어요.일본의 근해는 이미 물고기가 없었거든요.”아까호시 사장은 처음 네덜란드촌을 방문했던 때를 내게 이렇게 소개했다.
아까호시 사장이 네덜란드촌을 다시 찾은 것이 5월14일이었다.
그떄 마침 나도 네덜란드촌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내가 아까호시사장을 처음 만난 것도 이때였다.크지 않은 키에 다부진 몸매를 가졌고 양빈처럼 배가 유난히 컸다.그러고 보니 아까호시 사장눕썹이 ‘八’자 모양인 것을 뺴면 두 사람은 형제처럼 닮은 데가 있었다.
이번에 아까호시 사장과 동행한 사람들은 일본 해물시장의 쟁쟁한 기업가들이었다.그들은 양빈과 북한 해역 어업에 관한 상담때문에 온 것이다.아까호시 사장도 도착한 후 일본 최대의 수산물 회사인 MARUAH(원명 大洋漁業)에서도 상담요원이 선양에 왔다.
양빈은 이들과 물고기의 종류,출항증명,운송방법,포장,신선도,냉동 등 구체적인 문제를 논의했다.
일본 수산물 업체들이 북한 해역의 어업권에 이처럼 큰 관심을 보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일본 근해에서 물고기가 잡히지 않은지 벌써 오래 됐으므로 일본 국내의 수산물 공급이 급감하고 있었던 것이다.실제로 이들 수산물 업체는 북한 해역에서의 고기잡이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2002년6월27일 해산물 가공 및 냉동 등 관한 구체적인 협상을 위해 아까호시 사장이 다시 선양에 왔다가 해산물 가공공장을 돌아보기 위해 단둥에 갔다.아까호시 사장은 유라시아그룹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압록강 연안에서 산책을 하며 단둥 저 편의 신의주의 가옥과 강변에 줄지어선 나무들 그리고 강변을 따라 걷고 있는 신의주 주민들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중국과 북한 사이의 긴장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그날 밤,양빈은 지난 번과 같이 네덜란드촌의 그 유리화원에서 만찬회를 열고 아까호시 사장을 동반해 한담을 하고 있는데 양빈이 아까호시 사장 쪽으로 다가왔다.
“형님,오늘 단둥에 가보니 느낌이 어때요?”
“정말 아름다운 도시였어.강 저쪽이 바로 신의주더구만.”
“그래요.이 동생이 이제 그 신의주 특구 장관이 돼요.그런데 형님은 신의주 특구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까호시가 말했다.
“신의주 특별행정구 개방을 일찍 발표할수록 좋겠지.네 가지좋은 점이 있어요.첫쨰,미국의 북한에 대한 태도가 크게 달라질것이고 둘쨰,북한의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겠지,셋째는 동북아평화를 위해 기여할 것이고 ,양회장이 노벨 평화상을 받을지도 몰라.넷쨰는 물론 김정일이 세계를 향해 스스로의 능동성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와 함꼐 모든 문제가 순조롭게 풀리겠지요….”
양빈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그후 아까호시 사장이 선양을 다시 찾은 것은 2002년 8월20일이었다.당시 양빈은 홍콩,마카오 등지에 출장 중이었다.그러나 아까호시 사장이 이미 네덜란드촌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즉시 전세기를 타고 선양으로 돌아왔다.이에 아까호시는 크게 감동하며 직접 선양의 도선 공항까지 마중 나갔다.
아까호시 사장은 이 일을 얘기하면서 내게 “양빈은 마냥 그러하듯 미소를 지으며 전세기에서 내려오는 것이었어요.형님!그냥 그렇게 부르더군요.양총재와 함께 온 것은 마카오의 프로 도박사와 그의 가족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아까호시 사장의 이번 선양행은 양빈이 제의한 것이었다.양빈은 네덜란드촌의 도로 양측에 지은 상가 건물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식료(食料)업체와 유명 브랜드 전문점을 입주시킬 계획이었는데 일본의 업계에 인맥이 좋은 아까호시 사장에게 다리를 놓아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저는 네덜란드촌 중부에 골프연습장과 18홀의 골프클럽을 건설하라고 양빈에게 제안했어요.양빈이 크게 관심을 보이면서 즉시 땅을 보러 가자고 했습니다.그 땅에 양빈은 원래 3만 명 수용규모의 온수 수영장을 만들려고 게획하고 있었어요.거기다가 골프클럽 한 개를 더 세운다니 마음이 부쪽 동했던 것이죠.제게 언제 다시 올 것이냐고 물으면서 빨리 와서 계약을 체결하자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9월12일 아까호시 사장은 골프연습장과 18홀의 골프클럽 설계도를 가지고 그의 친구이자 골프전문가인 飯田康太郞을 동행해 선양에 왔다.
“그런데 양총재가 마침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급히 불러 북한으로 떠나고 없었어요.저는 북한이 신의주 특구를 지정할 날이 이미 가깝게 다가왔음을 느꼈어요(사실 이날 신의주 특별행정구 기본법이 통과됐다).”
아까호시 사장은 수고스럽게 친구를 데리고 선양까지 왔다가 양빈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는 유감은 컸지만 가슴속 깊이 차오르는 흥분을 억누를 길 없었다며 당시 상황을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까호시 사장은 9월28일 오전,신문을 통해 양빈이 선양에 돌아온 소식을 알게 됐다.도쿄의 신문들이 “신의주 특구 장관 양빈이 선양에서 신문발표회를 열고,신의주 무비자 입국을 허용할것임을 밝혔다”고 일제히 보도했던 것이다.
“드디어 이 날이 왔구나.가슴 가득히 차오르는 기쁨을 억누르길 없어 즉시 양빈에게 전화를 걸었어요.양빈으로부터 ‘빨리 선양에 오라’는 대답까지 듣고 나니 마음은 더욱 형언할 수 없이 들떴어요.다른 것은 더 생각할 것 없이 그 즉시로 선양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는 도쿄에서 비행기를 타고 다롄에 도착한 다음 비행기를 갈아타고 선양까지 어렵게 왔다.그가 선양 공항에서 네덜란드촌까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이 깊어진 떄였다.유라시아그룹의 저우샹이 아까호시 사장을 안내했다.밤이 깊었는지라 아까호시 사장은 양회장과 지금 만날 것이냐고 묻는 저우샹의 제의를 사양하고 양빈과 만남을 다음 날로 미루었다.
9월29일 양빈은 제1차 신의주 특구 준비위원회 회의를 소집하고 내외신 기자들을 회견하느라 일본에서 온 이 친구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그날 밤 늦어서야 마지막 손님을 배웅한 양빈은 겨우 불원천리하고 먼 곳에서 이 일본 친구와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아까호시 사장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저우샹이 특별히 안내해서야 나는 양장관을 마지막 손님으로 만났어요.저와 양빈은 포옹을 했지요.우리는 서로 반갑다는 인사로 큰배를 마주 비비며 다정함을 표시했습니다.양빈은 지쳤다면서 ‘누워서 얘기해도 되냐?’고 묻기에 ‘괜찮다’고 대답했습니다.그래서 양빈이 누워서 안마를 받았습니다.양빈이 그렇게 하니까 제 마음도 편해져 기분이 좋아졌습니다.그렇지만 우리 두 사람은 신의주 기초시설 건설과 자금유치 등에 대해 1시간 넘게 논의했어요.양빈이 피곤해하는 모습을 보기 안쓰러워 다음 날 오전 회의를 열고 계속 논의하기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이튿날인 9월30일 오전,양빈은 아까호시 사장과 신의주 특구의 자금유치에 관해 논의했다.아까호시 사장은 일본에서 중국 창업투자주식회사를 운영하기 때문에 일본의 투자자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어차피 신의주 특구를 건설하려면 급히 자금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아까호시 사장은 상담 금액의 자금을 무이자 대출로 제공해 ‘형님’이 신의주 특구의 프로젝트를 지원할 것이라고 양빈과 약정했다.
양빈은 아까호시 사장을 신의주 특구 일본대표부 대표 겸 총영사로 임명할 것을 제안했다.이에 아까호시 사장이 크게 기뻐하며 두 사람은 임명장을 손에 들고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양빈이 말했다.
“힘을 냅시다.신의주 특구는 광활한 기회의 땅이 될 것입니다.”
아까호시는 이에 답하는 뜻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나도 마음 속으로 꼭 노력할 것이라고 대답했지요.”
양빈은 10월7일 한국을 방문하고,10월9일 일본을 방문해 일본의 기업가와 투자자들을 만날 생각이라면서 아까호시 사장에게 준비를 부탁했다.
“그렇게 된다면 제가 대답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아까호시 사장이 나중에 나에게 한 말이다.
“저는 양빈이 일본에서 기업가와 투자자들뿐 아니라 고이즈미수상과의 면담 기회까지 마련하려고 노력했어요.그런데 수속이 쉽지 않았습니다.외무성과 고이즈미 수상과 연줄이 닿을 수 있는 사람들이 찾아 도움을 부탁했지요.
양빈은 또 아까호시 사장에게 “신의주 특구 장관이 된 것은 동북아의 평화를 위한 것인데 언론이 그런 진실한 마음을 전해주지 않아 정말 유감스럽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리하여 아까호시는 양빈에게 일본 방문에 앞서 일본 텔레비전방송과 인터뷰를 해 그런 생각을 솔직히 고백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양빈은 물론 통쾌히 대답했다.
이것 때문에 아까호시 사장이 일본에 간 다음 얼마나 정신없이 보냈는지는 두말 하면 잔소리다.어찌 됐든 아까호시 사장은 일본텔레비전방송국과 10월5일 중국의 선양 네덜란드촌에서 양빈에 대한 단독 인터뷰를 하기로 방송사측과 합의까지 해놓게 되었다.
일본에 가서 여러 가지 준비해야 할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아까호시 사장은 10월1일 돌아가게 됐다.바로 이날,한국 텔레비전방송에서 양빈 신의주 특구 장관이 신의주 한국대표부 대표로 한국인 김한균(金翰均)씨를 임명했다는 뉴스가 보도됐다.일본 NHK방송국이 이 뉴스를 중계하면서 이 소식은 일본에도 알려지게 됐다.
“저녁 무렵이었는데 그 날은 바람이 세찼어요.비행기가 일본나리다공항에 도착한 것은 예정시간보다 두 시간이나 늦었습니다.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제가 부탁한 외무성의 친구한테 달려갔어요.양빈의 일본 방문을 논의하기 위해서였습니다.그를 만나 내가 이미 신의주 특구 일본대표부 대표로 임명됐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어요.친구도 이 소식을 듣더니 축하인사를 해주었습니다.우리 두 사람은 맥주로 건배를 했습니다.저녁 8시쯤,저우샹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그가 맥 빠진 목소리로 양총재가 일본에 못갈 것같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말 못할 불안감이 서서히 밀려왔지요.이에 앞서 나는 선양 영사관에서 일본으로 가는 비자를 어렵게 발급받던 일이 생각났습니다.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지요.”
이러는 동안 언론의 보도는 계속 이어졌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신의주 특구 장관 양빈 4일 신의주 방문계획 취소라고 보도했다. ‘홍콩상보’는 ‘양빈의 출국방문 무기한 연기’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보도했다. “지난 9월27일 양빈은 “10월7일 한국의 금화산업주식유한회사를 방문하고 한국기업협회측과 면담을 가진 후 10월9일 일본의 아까호시 중국벤처투자회사 사장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할 것이며 伊藤忠 상사측과 면담을 가질 예정이라고 밝혔으나 그 계획이 연기됐다.양빈은 이와 관련해 신의주의 장벽을 쌓는 문제가 더욱 중요하므로 한국과 일본 방문일정을 잠시 뒤로 미뤘다고 말했다.
뉴스를 통해 이 정도로 알고 있을 뿐 아까호시 사장은 양빈이 일본에 갈 수 없는 진정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사실 그 내막을 자상히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10월4일 ,신의주 특구 일본대표부 대표로 임명됐던 아까호시 사장은 도쿄 텔레비전방송과 신문을 통해 4일 새벽 양빈이 선양경찰에 연행된 사실을 알게 됐다.
나중에 아까호시 사장은 내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양장관이 공안당국에 연행됐다는 소식을 듣고 머리 속이 텅 비는 것 같았습니다.양빈이 불쌍합니다.도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양빈, ‘뉴욕타임스’ ‘이코노미스트’와 연쇄 인터뷰
9월30일 ,우리 귀에는 이상한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다.단둥변방에서 이미 통지를 받았다는 등….
10월1일은 중국의 국경절이다.나와 왕뤄,양다융 변호사 등은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네덜란드촌에서 보내온 싼타나를 타고 헤이그호텔로 향했다.우리가 머물러 있는 별장에서 헤이그호텔까지는 불과 1,000m정도의 거리다.차가 호텔을 향한 도로입구에 들어서는데 경찰차량 한 대가 어디선가 나오더니 우리 앞을 막아서며 ‘검사’를 해야겠다는 것이었다.그러먼서도 차 안을 들여다볼 뿐 우리더러 내리라는 말은 안하고 기사에게 승용차 드렁크를 열게 하더니 한번 볼 뿐 그냥 가라는 것이였다.
호텔 음식점에 도착해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안 되어 차오성리,마닝,왕후이둥 등이 따라 들어왔다.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일을 겪었음은 두말 할 것도 없다.모두들 금방 있은 ‘검사’에 대해 얘기를 했다.그러나 우리 중의 누구도 검사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심지어 우리를 차에서 내리게도 하지 않았다.다만 승용차 드렁크를 열어보았을 뿐이다.도대체 어찌된 일인가.그 자리에 모인 양빈은 고문들을 아무도 그 연유를 정확히 해석하지 못했다.
10월2일 네덜란드촌에 경찰차량이 많아졌고 네덜란드촌에서 밖으로 나가는 모든 차량은 반드시 검사를 받아야 했다.
양빈과 한국기자로 유일하게 회견한 연합뉴스 홍덕화 차장(통일외교부.당시 홍콩특파원)
나는 일종의 말 못할 불안감을 느꼈다……
10월3일이 되자 경찰차량이 더욱 많아졌다.양빈의 A9별장은 거의 포위된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가 신의주 특구 장관이니까 급별로 따지면 조선 부총리급이니 경찰이 보호조치를 취하는 것은 당연하지……”
양빈이 모두를 위안하려는 듯 나름대로 해석했다.
기자들의 질문에도 양빈의 대답은 마찬가지였다.그렇지만 그역시 마음 속으로 불안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나는 줄곧 그의 곁에 있었다.친구나 기자를 만날 떄 그의 눈빛과 표정,목소리에는 긴장감이 묻어 있었다.양빈은 마닝,웡융시,왕후이둥에게 물어봤지만 그들은 “아니겠지”, “지금 당신은 특구 장관이니까!”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그러나 마닝이나 웡융시,왕후이둥 등은 양빈의 네덜란드촌과 농업 상장회사에서 발생한 일들을 모르고 있었다.
당시 북한 정부의 관리 한명철씨도 양빈의 별장에 머물러 있으면서 선양 주재 북한영사관 총영사 및 평양측과 연락을 담당하고 있었다.그러나 양빈이 기업가 또는 친구를 만나거나 기자들의 인터뷰에 응하는 등의 등의 활동에는 절대 참여하지 않았다.
양빈이 9월27일 신문발표회에서 ‘9월30일 외국기자들의 신의주 특구 무비자 입국이 가능하다’고 분명히 밝혔으나 그것은 현살화되지 못하자 수많은 기자들이 이에 반발했다.특히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문 잡지 텔레비전방송 기자들이 네덜란드촌에 운집되어 이날 10월3일은 무척 북적거렸다.양빈은 별장에서 미국 영국 일본 한국과 홍콩 등 국가와 지역의 내외신 기자들과는 별도로 인터뷰했다.
내가 여기서 독자들에게 공개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양빈의 대화는 ‘이코노미스트’의 기자 마이제스(麦傑思)와 홍콩 봉황위성TV쩡즈모 기자와의 인터뷰 내용이다.그 이유를 설명하자면 마이제스는 북한에 여러번 갔었기 때문에 그 곳 사정을 잘 알고 있었고 또 영국의 이코노미스트가 매우 권위있는 간행물이기 떄문이다.마이제스의 질문은 그만큼 민감하면서도 또 정곡을 찌르는 데가 있기 떄문이다.
다음은 양빈과 마이제스 간의 인터뷰 내용이다.
마이:지난 7월 내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는 물가,임금개혁이 한창이었다.특히 식량가격을 조정하고 잇따라 물가개방과 임금,환율도 조정하는데 이는 북한이 이미 개방정책을 시행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인가?
양:북한의 농민들은 농사가 위주이다.그들은 조(組)단위로 농사를 짓는데 3가구 내지 4가구가 한조를 구성한다.지난 수십년 동안 조선은 식량의 총괄구매와 판매정책을 시행해왔으며 주민들의 밥먹는 문제는 국가에서 맡아 해결했다.농민들로부터 식량 수매가격은 1kg 당 조선 화폐로 0.6원 내지 0.8원이었다.그러나 지금은 1kg 당 3원으로 인상됐다.금년 7월 시장개방 후 식량가격은 1kg 당 30.40원으로 인상돼 농민들의 식량생산 적극성이 크게 높아졌다.식량가격이 개방되면서 물가와 임금수준도 상응하게 인상 조절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조선의 개혁이 시작된 것으로 볼수 있다.8월 남북한을 연결하는 철도와 도로가 착공 및 개통되고 또 신의주 특구가 건립되는 등 이 모든 것은 조선의 대외개방을 위한 연쇄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이:북한 신의주 특구는 경제방면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양:북한이 나진 선봉 개방에서 실패한 것은 지리적 원인과 또 단순히 경제무역구의 기능에 한했던 등 여러 가지 요소가 있다.김정일 장군은 나진 선봉의 경험과 교훈을 감안하여 신의주를 대담하게 특별행정구로 지정하고 자유개방 정책을 시행하기로 한것이다.외국 기업가들이 책임지고 개발하고 장기적인 토지임대제도를 시행하고 외상투자와 제품의 반출입 자유화 등을 시행할것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기자 마이제스가 양빈을 인터뷰하는 장면
마이:자본유치,기초시설,항구,수력발전 등은 모두 대량의 자금을 필요로 할 텐데 투자 총량은 얼마인가?
양:국제관례에 따르면 1평방 킬로미터의 땅에 5억 위안의 투자가 필요하다.중국은 현재 1평방 킬로미터당 2억 위안을 투입한다.신의주 특구가 132평방킬로미터니까 적어도 100여 억 달러의 예산이 필요하다.도로,다리,물공장 시설,페수처리,가스 등은 특구정부가 투자하는 국유화 체제를 시행하고 통신 전력 등은 사유화 체제를 시행하겠다.첫 5개년 계획 기간에 기초시설 건설을 완성하겠다.
마이:국제 금융기관의 자금지원 없이 가능한가?
양:기업인으로서 자본운용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아름답고 현대화한 도시를 건설하려면 돈이 필요하다.김정일 장군님은 내게 권력과 132평방 킬로미터의 땅을 두었다.토지양도,채권,유엔기금의 20,30년 기한 기초시설 건설융자 그리고 내가 그 동안 경제계에서 쌓은 좋은 신용관계를 동원한다면 자금지원을 받을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이:미국정부의 대축지원이 없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양: 시간을 잘못 기억하지 않았다면 켈리 미국특사가 오늘 평양에 도착한다.
마이:당신은 미국 관계당국과 연락을 해봤나?
양: 안 했다.
마이:특구 지정은 누가 제안한 것인가?
양:김정일 장군이 제안했다.금년 1월 나에게 처음 얘기했다.이처럼 대단한 결심은 아무나 할 수 없다.보통 수령이 할 수 있는것이 아니다.중국의 개방이 사구(蛇口)에서 시작된 것처럼 신의주 특구도 조선의 개방을 위한 첫 시작이다.
마이:당신은 중국정부에 통고했나?그들의 의견은 무엇인가?
양:내 기업은 랴오닝에 있으므로 성 정부에만 통고했다.랴오닝은 지방정부이고 외교는 국가의 일이다.만약 특구에서 1조의 투자를 유지한다면 그중 6.000-7,000억은 중국에 유입될 것이며 최우선 지역이 랴오닝이 된다.이는 지역경제 발전에 이롭다.
마이:오늘 경찰이 많이 와 있고 또 언론에서 관심이 민감하다.외신기자들도 예외없이 검사를 받는다,이 점에 대해 걱정되지 않니?
양:걱정될 것 없다.신의주 특구 건설은 평화와 발전의 원칙에 부합된다.나 자신이 신의주 특구 장관이 된 것은 돈 때문이 아니다.경제적으로 발전하면 전쟁을 할 것이 아니라 평화를 도모하고 지속발전을 해야 한다.동북아 평화의 전제는 동북아 각 국가가 다 잘 살아야 한다.한반도가 통일되면 북한도 국제사회에 참여할 것이다.50년 동안 폐쇄됐던 사회주의 국가에서 낡은 관념을 버리고 새시대의 요구에 따라 개혁 개방을 하고 세계로 나아가기를 희망하고 있다.나는 네덜란드 국적이다.유럽은 북한과 양호한 외교관계를 맺고 있고 중국과 북한은 피와 불 속에서 맺은 친선이다.특히 두 사회주의 국가 사이에서 자본주의를 시행하는 특별행정구가 중국의 지원이 없이는 발전하기 어렵다.중국이 지원할 것이라고 확신한다.마오쩌둥 시대에 맺은 중조친선,덩샤오핑 시대의 개혁개방 정책,중국 지도자의 평화와 발전 주장은 신의주 특구의 건설과 발전에 적극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중국이 이에 대한 다른 생각이 있더라도 조만간 풀려질 것이다.
마이:다른 생각이란 무엇을 가리키나?
양:나는 아들이다.어머니가 아들을 오해한다 해도 어머니는 어디까지나 어머니이다.나도 베이징에 가서 국가 지도자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내 생각을 말하고 싶다. ‘기본법’은 특구에서 정치를 하는 것과 중국 조선을 반대하는 모든 활동을 금지한다고 규정했다.나 자신이 할 일은 최선을 다 했다.
마이:신의주 특구 철거민은 얼마나 되나?철거비용은 어떻게 해결하는가?
양:50만 명 인구 중 40%에 해당하는 20만 명만 남기고 나머지는 이주시킬 예정이다.철거는 조선 정부가 할 일이고 2년 내에 이주를 완성하겠다.
마이:중국이 선전 특구를 만들 때 중국 정부의 지원이 있었고 홍콩의 자금이 대량 유입돼 선전이 경제발전을 할 수 있었다.그러나 신의주 특구는 북한이나 세계은행의 자금지원이 없으니 자금압력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중국 일본 한국의 특혜대출까지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양:선전은 경제특구였지만 신의주는 완전히 자유화된 행정특구이다.신의주 특구에서 창업에 우월한 조건과 낮은 세율을 적용한 다면 세계의 자본은 신의주에 유입될 것이다.그리고 일본,한국등 국가와 교류를 밀접히 하겠다.중국 정부가 아직 분명한 의사를 밝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마이:세금은 북한 정부에 납부하나?중앙정부에 어떤 좋은 점이 있나?
양:인민의 돈은 인민을 위해 사용한다.김정일 장군이 특구를 건설하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이익 때문이 아니라 정치 때문이다.국제환경이 급격히 변화되고 미국의 대북 제재가 강화되는 데다 수년 동안 연속되는 자연재해 때문에 조선은 심각한 난관에 직면했다.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김정일 장군은 조선의 간부들에게 새로운 추세에 적응하는 ‘혁신’, ‘창조’를 이뤄낼 것을 요구하고 있다.김정일 장군은 사상이 개방된 수령이며 조선은 평화와 국제교류를 희망한다.단기 내에 신의주 특구에서 큰 수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그러나 신의주 특구 건설을 통해 조선의 청년인재를 대량 육성할 것이며 앞으로 특구 규모를 확대하고 선진적인 경험을 보금할 것이다……
마이:당신의 뜻은 이해가 간다.그러나 대부분 지역이 사회주의 모델이라면 작고 작은 특구의 영향력이 과연 얼마나 크겠는가?
양:땅밑에 반년 동안 있던 광부가 어느 날 갑자기 땅 위에 올라온다면 쉽게 적응하기 어렵다.북한은 50년 동안 폐쇄적이었다.그러므로 전체 북한 인민들은 한결같이 적응하라고 요구할 수 없다.과정이 필요하다.
마이:최근 언론보도에 따르면 당신이 세금 체불 때문에 세무조사를 받고 있다는데 상황을 설명한다면?
양:유라시아회사 사무청사 대문 입구 벽에서 ‘납세선진단위’이 라는 팻말이 걸려 있다.나는 선양 세무국과 매년 구정시간에 납세하기로 했다.올 해 납세 기일은 10월12일이다.나는 세금을 체불하지 않았다.
마이:1992년부터 2002년까지 나는 평양에 5번 갔다.북한의 변화가 큰 것 같다.사람들의 사상도 많이 변화되는 것 같다.
양:작년 북한에 처음 갔지만 그 뒤로 벌써 몇 번이나 갔다 왔는지 모른다.가 본 곳도 많다.그럴 때마다 그 곳의 변화 와 발전템포가 빨라지고 있음을 느꼈다.
마이:인터넷에서 본 것 같은데 양총재의 네덜란드 거주권은 정치피난을 이유로 신정한 것으로 알고 있다.
양:당시 네덜란드에 유학한 중국 유학생 치고 거주권 신청을 하지 않은 학생은 별로 없다.이 점은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신의주 특구 건설은 동북아의 냉전이 끝났음을 의미하며 또 북한이 국제사회에 참여하기 위해 한 걸음 내디뎠음을 의미한다.이는 평화와 발전의 대 추세이며 나 자신은 평화의 사자가 되기를 희망한다.
양빈이 별장에서 내외신 기자들가 인터뷰를 가지는 동안 나는 양빈의 전기를 쓰는 작가 신분으로,왕후이둥은 특구 준비위원회 대변인 신분으로 줄곧 양빈을 동반했다.나로서는 그들의 대화내용을 자세히 기록할 수 있는 기회였다.
양빈은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를 끝내고 ‘뉴욕 타임스’와 한국의 ‘연합뉴스’기자와 인터뷰를 가졌다.
한국 기자들은 질문은 간단했다.한국 기업인들의 신의주 특구투자가 가능한지,어떤 특혜정책을 부여할 것이며,특구의 기초시설 건설의 공개입찰은 어떻게 할 것이냐는 등이 자주 했던 질문들이었다.한 마디로 한국기자들의 가장 큰 관심은 한국 기업인들의 신의주 특구 투자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양빈과 미국 ‘뉴욕 타임스’상하이 지사장과의 대화는 다소 새로운 내용이 있어 여기서 일부만 적기로 하겠다. ‘뉴욕 타임스’상하이 지사장은 미국인이었는데 쿵저우(孔周)라는 꽤 재미있는 중국이름을 갖고 있었다.다음은 인터뷰 내용이다.
쿵:북한과 접촉은 어떻게 했나?
양:북한이란 나라는 아주 어려서부터 교과서를 통해 알았다.그러나 작년에야 북한에 처음 가봤다.평양은 조용하고 정결한 도시이다.유럽의 어느 도시보다 아름답다.북한의 관리들은 사상이 개방적인 편이다.외부의 세계에 대해 알고 있고 국제교류에 참여하기를 희망한다.내가 직접 본 북한의 모습은 외국 언론의 보도와 달랐다.
내 사업은 농업이다.북한의 농업을 시찰하기 위해 매달 1,2회씩 북한에 다녀왔다.그곳 인민들이 겨울철에도 신선한 야채를 먹을 수 있게 하기 위해 중국의 온실을 북한에 옮겼고 또 외국의 우량종 과일이나 화훼 품종을 도입했다.북한은 구릉이 많고 평원이 적다.북한의 현대농업 발전을 돕고 싶을 뿐이다.북한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은 한국이나 일본에 수출할 것이며 한국과 일본은 조선의 최대 시장이 된다.
내가 북한을 돕는데 대해 회사나 가족들이 이해 하지 못한다.덩샤오핑의 대외개방 정책 때문에 내가 유럽으로 가고 네덜란드 유학을 할 수 있었으며 귀국해서는 기업을 할 수 있었다.나는 지금 돈이 있다.나는 한반도의 평화를 희망한다.중국 지도자는 평화와 발전을 주장한다.세계3대 불안정 지역 중 아시아에서는 한반도가 꼽힌다.그곳은 평화와 경제발전이 필요하다.나는 조선을 위해 공헌하고 싶다.북한이 선진농업을 알게 하기 위해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을 뿐이지,특구 장관이 된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김정일 장군은 내게 특구 건설을 맡겼고 북한 인민은 나를 선택했다.나는 북한의 개방을 위해 후반생을 바칠 각오가 돼 있다.
쿵:한국이나 일본 기업가들이 북한에 대형프로젝트 투자를 원했지만 북한 정부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그런데 어떻게 당신에게 그 기회를 주었는가?
‘뉴욕타임스’쿵저우(孔周),판원신(范文欣)이 양빈을 인터뷰하고 있는 장면.
왼쪽 첫 번쨰 가 판원식 사장 보좌관이고 ,왼쪽 두 번쨰가 쿵저우 상하이 지사장이다.
양: 나는 북한 인민을 이해한다.북한에 처음 갔을 때부터 나는 진심으로 그들을 도우려고 노력했다.2년 동안 자동차와 선박으로 식량,통조림,분유,햄버거,초콜릿 등을 전달했고 농업시설을 건설해 겨울철에 신선한 야채를 공급하게 했다.이를 통해 나는 북한 인민들과 두터운 정을 쌓았다.김정일 장군은 바로 이 점을 높이 평가하고 특구 건설이라는 임무를 내게 맡긴 것이다.이는 역사적인 원인도 있지만 현실적인 필요이기도 하다.
쿵:김정일 장군이 당신을 처음 만나기로 한 것은 언제인가?
양:비밀이다.신비한 두 사람이 신비한 하나의 특구를 만들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쿵:개인적으로 신의주 특구에 이주할 생각이 있나?
양:취임선서를 한 그 날부터 후반생을 신의주 특구를 위해 바치기로 했다.신의주 특구는 주변 많은 국가의 이익에 관계된다.그러나 나 자신은 공정 공평 고능률 및 청렴하게 일하겠다.
쿵:한국과 일본을 방문하고 미국에 갈 계획은 없나?
양:계획은 있다.나는 내일 신의주에 간다.당신들 단둥에 가봐라.그 곳에는 신의주 개방을 기다리는 200여만 명의 주민이 있다.신의주 특구가 건설되면 가장 큰 수익자는 중국이고 랴오닝성이며 단둥이다.
쿵:신의주 특구에서 맡은 직무는 무엇이나?
양:특구 장관이다.비자를 발급할 수 있다.
쿵:외국기업이 투자를 시작할 수 있니?
양:10월말부터 시작하겠다.한국,일본,대만,홍콩,미국의 모든 기업이 신의주 투자가 가능하다.카지노 투자도 허용하겠다.미국의 옛 병사들이 신의주에 왕림하고 투자하는 것을 환영한다.
쿵:신의주 특구 기본법은 홍콩과 같은 것인가?
양:기본법은 유럽과 아시아 국가의 법률과 홍콩의 기본법을 참조했다.기타 법률도 곧 출범할 것이다.법률은 공평과 평등을 강조할 것이며 미국의 법률도 참조할 것이다.신의주의 기본법이 특구 장관에 부여한 권력은 홍콩의 행정장관보다 크다.
지금은 한 장의 백지 같지만 이제 그 곳에 멋진 그림이 그려질것이다.세계 최저의 세율을 적용할 것이며 우월한 인재정책으로 세계 각국의 영재들을 영입하고 작은 유엔을 만들겠다.
쿵: 외국언론을 안 좋게 생각한다고 들었는데 무엇 때문인가?
양:많은 외신기자들이 북한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다.나진과 선봉의 실패를 교훈 삼아 김정일 장군님은 신의주 특구 기본법에 더 많은 권리를 부여했으며 중앙의 각 부문과 지방정부도 특구의 실무를 간섭하지 않기로 했다.
9월25일 북한 서열 4위인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내가 “특구에 자주 오셔서 잘해주십시오”했더니 “당신이 내게 비자를 발급하지 않으면 못 가요.기본법이 준 권리입니다.우리는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라고 하더라.그 말을 듣고 감동했다.북한은 내게 군사 외교를 제외한 모든 권리를 준것이다.
쿵:주둔 부대가 있나?
양:특구의 경제발전을 보증하기 위해 주둔군을 섬에 두겠다.
쿵:당신은 네덜란드 국적이면서 북한 국적을 취득했는데 중국당국을 인식하지 않나?
양:나는 그 점을 매우 조심한다.중국이 지지할 것이라고 확신한다.외교부 장치웨(章启月)는 환영과 지지를 한다고 표시했다.중국은 나의 어머니이다.아들이 까불고 말을 듣지 않으면 매를 맞아야 한다.그러나 아들은 영원히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는다.
쿵:유라시아농업과 세무문제는 이것과 아무 영향이 없나?
양:유라시아농업은 상장기업이다. 세무문제는 선양측과 협의를 달성했다.10월12일까지 완납하기로 했다.
외자기업은 면세인데 지금은 면세받을 수 없다.상장기업의 천쥔(陳軍)이 갔다.갑자기 사직한 것이다.지금 미리 리강을 농업공사의 총사장으로 임명했다.사람이 큰 일을 하려면 이해를 밪지 못하기 마련이다.이제 날짜를 정해가지고 신의주 특구에 부임하러 가곘다.당신들도 함께 갔으면 좋겠다.
양: “나는 김 장군이 조미관계 개선을 진심으로 희망한다고 믿습니다.이는 북한 인민의 이익에 부합됩니다.”
봉황위성TV 쩡즈모의 마지막 인터뷰
미국 ‘뉴스 타임스’지 기자 쿵저우,판원신과 인터뷰를 끝내고 양빈과 함께 작은 접견실에서 나오면서 나는 ‘베이징 여자’가 이미 대접견실의 소파에 앉아 거기에 모인 사람들과 웃으며 한담하는 것을 보았다.
양빈은 예의를 지키며 쿵,판을 큰 접견실 문 입구까지 전송하고 손님들이 다 떠난 다음에야 몸을 돌리며 쩡즈모와 인사를 했다.
“언제 왔어요?”
아주 오랜 친구를 대하는 것 같은 관심이 담긴 어조였다.
“양총재님,금방 왔어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대답했다.그녀가 양빈을 부르는 호칭은 ‘특구 장관’이 아니라 예전 그대로였다.앵빈이 소파 쪽으로 다가서자 모두들 비키며 자리를 내주었다.큰 접견실에는 소파3개 놓여 있었는데 큰 것이 하나,작은것이 두 개이다.양빈은 큰 소파에 않으며 옆자리를 가리켰다.쩡즈모를 곁에 와 앉으라는 뜻이었다.쩡즈모가 스스럼없이 양빈의 옆자리에 앉자 나도 양빈을 동반해 손님을 접견할 때처럼 친구들이 내어준 작은 소파에 않았다.
‘베이징 여자’는 나를 보자 자리에서 일어서며 악수로 인사를 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고향사람을 만나 반가워요.”그녀의 인사를 받으며 나도 답례로 한 마디 했다.그녀는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
쩡즈모와 동행한 봉황위성TV의 다른 여기자가 저쪽 소파에 앉아 있었다.쩡즈모가 양빈에게 그녀의 동료를 소개했다.
그들 일행은 남자 촬영기자 한 명까지 합쳐 3명이었다.그 촬영기자가 렌즈를 양빈 쪽으로 초점을 맞춰놓고 조명설비를 가지러 나갔다.
이들 세 사람은 봉황위성TV 취재팀이었는데 쩡즈모의 인솔 하에 북한의 각 지역과 신의주에서 취재를 마치고 선양 네덜란드촌에 들린 것이었다.양빈은 쩡즈모가 북한에서 자유롭게 취재를 할수 있도록 북한측에 많은 공작을 해두었다.북한이 외국 텔레비전방송국 기자들에게 이처럼 폭넓은 참관과 취재를 허용하기는 최근에서 유일한 경우였다고 한다.
2002년4월3일 저녁,홍콩 봉황TV 프로젝트 쩡즈모가 인솔한 취재팀이 양빈취재를 마친 후의 사진
“북한에서 취재를 하다가 위험을 만났다면서요?”
양빈이 스스럼없이 한 마디 물었다.
“자동차가 강을 건너게 됐는데 큰 비 떄문에 다리가 끊겨서 오도가도 못하게 됐죠.다행이 북한 운전기사가 길을 에돌아서야 무사히 강을 건넜답니다.”
쩡즈모가 당시 상황을 간단히 설명했다.
쩡즈모의 양빈에 대한 인터뷰는 저녁 6시 30분부터 시작됐다.
큰 접견실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작은 접견실과 윗 층에 올라가고 양빈과 쩡즈모의 대화를 기록하기 위해 나만 여전히 그 자리에 있게 됐다.그러나 그것이 내가 양빈을 위해 하는 마지막 기록일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양빈 숙소에서 홍콩기자 쩡즈모와 필자
그떄까지 나 역시 꿈을 꾸고 있었다.10월4일이면 양빈 일행을 따라 신의주에 가게 된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10월7일에는 양빈 마닝 웡융시 등과 함꼐 한국에 가고,한국에 가서 김대중 대통령과 면담하게 되면 그 순간들을 자세히 기록할 것이라고 다짐했다.그리고 10월9일에는 또 일본에 가서 일본 기업인들을 만날 것이다.아까호시 선생도 이미 양빈의 일본 방문을 위해 만단의 준비를 했고 아사히신문측도 양빈의 인터뷰를 위해 모든 준비가 다 돼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꿈이 돼버렸다.순간이 지나면 현실로 변할 것 같던 모든 신화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그것이 정말 신화라면 참혹한 현실에 부딪쳐 비누거품처럼 흩날리더니 어느 사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큰 접견실의 조명등과 봉황위성TV의 취재를 위해 설치한 조명까지 커져 있어 실내는 정말 대낮처럼 밝았다.양빈에 대한 인터뷰가 시작됐다.
쩡:평양에서 돌아온 후 어떤 변화가 있나?
양:일본,대만,미국 투자자들이 신의주 특구에 큰 관심을 보이는데 비해 중국은 담담한 편이다.그러나 신의주 특구의 새로운 발전방향은 중국 3세대 지도자들의 사상에 부합된다고 생각한다.덩샤오핑은 중국의 개혁개방 방향을 제시해 중국은 빈공능 벗어나 부강해질 수 있었다.지금은 WTO에 가입하고 국제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북한도 개방을 원하며 국제사회에 참여하기를 희망한다.신의주 특구 개발이 잘 말해주고 있다.이는 중국 지도자가 역설했던 ‘평화와 발전’이란 주제에 부합된다.신의주 특구가 개방되면 중국에도 50만 개의 일자리를 제공하게 된다.
쩡:중국 정부가 담담한 이유는 무엇인가?외교부 대변인이 신의주 특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양:네덜란드촌은 랴오닝성 최대규모의 외국인 투자기업이다.나 개인은 지난해 포브스가 선정한 중국 100대 부자 가운데 제2위였다.그래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중국은 가난한 사람을 동정하지 부자를 동정하지 않는다.방대한 규모인 네덜란드촌 건설의 수익자는 정부이다.내가 갖고 갈 수 없지 않는가!내가 39살이라는 이렇게 젊은 나이에 특구 장관이 되었으니 비난이 따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한다.아들이 어머니의 비난을 받는다고 해서 어머니를 미워할 수 없다.북한 고위층과 대화를 하면서 “나는 조선에 장가오는 것이다.반드시 2,300만 조선 인민에게 충성을 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그러나 난 또한 중국사람이다.중국의 주권과 안전을 수호하는 데 책임이 있다.
쩡: 어떤 비난이었나?
양:선양의 지방정부 관리들은 내 전화도 감히 받지 못한다.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오해가 있다고 생각한다.
쩡:부정적인 영향은 없나?
양:없다.경제학자와 기타 학자들이 없다고 한다.
쩡:중국과 북한은 구체적인 문제에서 마찰이 있는데 당신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양:중국과 북한 관계에 영향을 줄 수 없다.중국과 북한이 내게는 며느리와 시어머니 같은 존재다.수십만 명의 지원군 열사들의 피로 바꿔온 중조관계인데 이는 막중한 대사(大事)이다.
쩡: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신분에 관심을 갖고 있다.놀라운 조합이라고 생각한다.
양:이 문제에 대해 대답한 적이 있다.나 자신은 평범한 중국사람이다.
쩡:네덜란드촌 대문 입구와 도로가 특별보호를 받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양:중국 정부가 취하는 보호조치라고 생각한다.매우 정상적이다.
쩡:이처럼 많은 인력과 경찰차량이 동원된 이유는 무엇이냐?
양:모르겠다.
쩡:한국이 가장 흥미를 느끼고 관심을 가지는 문제는 무엇인가?
양:북한은 한국의 여권을 승인하지 않는다.중국이 대만동포에 적용하는 방법으로 이 문제를 처리하겠다.신의주 특구에서 공민의 권리는 누구나 평등하다.
쩡:신의주 특구에서 한국인이 관리로 될 수 있나?
양:그렇다.
쩡:신의주 특구에 투자하는 사람은 있나?
양:수백 명에 이른다.
쩡:신의주 특구가 10년 내에 그처럼 많은 자금을 유치할 수 있다고 믿어도 되나?
양:세계의 자금은 많다.그들은 모두 투자기회를 찾고 있으며 신의주 특구는 투자자들의 낙원이 될 것이다.특구 정부의 우수한 인재정책과 낮은 세율은 세계 각국 기업가들의 투자를 흡인할 것이다.
쩡:미국의 태도는 어떠한가?
양:환영하는 태도이다.
쩡:무엇으로 판단하나?
양:북한이 신의주 특구를 지정한 후 미국은 북한을 테러대상국에서 제외했고 켈리가 북한을 방문했다.세계는 북한에 대해 너무 모른다.그래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북한에 가 봤으면 좋겠다.9월24일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위원장이 내게 특구 장관 증서를 발급한 후,양형섭 부위원장은 연회에서 이런 말을 하더라. “당신의 비자가 없으면 난 특구에 갈 수 없어요.”그 말을 듣고 크게 감동했다.
쩡:북한은 신의주 특구로 새로운 이미지를 수립했다.그러나 홍콩 증시에서 유라시아농업의 주가는 파동을 겪고 있다.당신이 특구의 CEO가 되면 이런 파동이 더 커지는 것이 아닌가?
양:유라시아농업의 파동은 정상적인 파동이 아니라 일부 펀드가 신뢰심이 없고 또 언론의 조종 때문이다.특히 상하이 ‘국제금융보’의 무책임한 보도 때문이다.기자들이 경호원에게 몇 마디 묻고 그것을 근거로 기사를 쓴 것이다.
쩡:특구 장관을 위해 많은 손실을 입었는데 그럴 가치가 있는가?
양:동북아의 평화와 발전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다.나의 아버지는 33세에 돌아갔다.나는 평화를 소원하며 평화를 위해 노력하겠다.
쩡:아마 대만의 어느 신문인 것으로 기억되는데 당신과 북한의 김정일이 친척관계라고 보도했다.
양:아니다.
쩡:당신은 9월30일부터 신의주 특구 무비자 입국이 가능하다고 했는데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양:기본법이 내게 준 권리는 그것이 가능하다.그런데 신의주에 아직 격리 장벽을 쌓지 않았다.임시 장벽을 쌓는다고 해도 두달이 걸린다.민주적인 지도자로서 내 잘못을 공개 사과한다.
쩡:그렇다면 장벽을 전부 쌓아야 되나?
양:이번에 신의주에 가서 이 일을 논의할 생각이다.빠른 시일내에 해결하도록 하겠다.
쩡:단둥과 신의주를 연결하는 대교를 건설하기 위해 중조 양국이 협상 중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언제쯤 착공하나?
양:내년이다 .랴오닝성 정부가 책임지고 시공한다.
쩡:한국이 투자해 서울에서 신의주에 이르기까지 고속도로를 건설할 것이라고 보도했다.북한측은 이처럼 중요한 도로를 한국측이 장악할까봐 두려워하지 않는가?
양:이 문제는 북한 정부가 해결할 것이다.
쩡:며칠 전 우리는 신의주에 갔었다.그 곳 주민들은 특구의 미래에 대해 잘 모르고 있던데 어떻게 생각하나?
양:신의주 인구는 50만이다.그중 20만만 남기고 나머지 30만은 남신의주로 이주시키겠다.
쩡:현지 주민들은 언제쯤 알게 되나?
양:내일(10월4일) 신의주에 가서 시찰하고 10월25일쯤 정식부임하겠다.이날은 50년 전 지원군이 압록강을 건넜던 날이다.내일 신의주에 가서 구체적인 사안을 논의하고 협상하겠다.
쩡:10월25일 전에 현지 주민들에게 특구 건설계획을 발표할 생각은 없나?
양:이번에는 신의주 특구 건설계획을 위한 시찰이다.
쩡:입법회의 선거와 정부리포트는 언제쯤 발표하나?
양:부임한 후 먼저 특구 준비위원회 리포트를 발표하겠다.
쩡:누구누구로 구성되나?
양:아직 내정일 뿐이다.
쩡:특구 주민들의 복지대우는 어떻게 할 것인가?
양:전민 보험가입 체제로 하겠다.교육은 무료교육과 교육비징수 두가지 방법을 병행하겠다.난 고아이다.어릴때 주민관리 위원회에 가서 증명서만 받으면 등록금 일부를 면제받을 수 있었다.특구에서 북한 주민들은 무료로 할 수 있다.
쩡:내가 신의주에 가보니 현지 주민들은 특구 건설에 대해 뭐가 뭔지 잘 몰랐지만 김장군의 지시가 내리면 믿고 따르겠다고 했다.
양:김장군의 명령 하나면 전체 국민이 따르고 지지한다.
쩡:특구 장관,소식에 따르면 남북한은 새로운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김대중이 북한의 경제회복을 돕겠다고 표시했다.당신은 이 점을 어떻게 생각하나?
양:한국 정부는 신의주 특구 건설을 지지하며 한국의 일반인들도 신의주에 오기를 희망한다.
쩡:한국 정부와 민간의 지지를 얻고자 하는 것이 한국에 가는 이유인가?
양:그렇다.그러나 성공을 결정하는 결정적 요소는 아니다.일본 대만 홍콩 등 여러 국가와 지역의 기업가와 자본은 모두 신의주 투자를 준비하고 있다.이는 중국의 자금유치와 다르다.
쩡:미국이 북한을 테러대상국에서 취소하기로 한 것은 신의주 특구 건설과 관계되나?
양:그렇다.미국이 김정일 장군의 결심을 보았기 때문이다.
쩡:세계은행이 지지할 것이라고 생각하나?
양: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신의주 특구도 홍콩 마카오처럼 일부 국제적 기구에 가입할 것이다.우린 좋은 일을 하고 있다.
쩡:북미관계가 아직 개선되지 않았는데 미국이 신의주 특구 건설을 지지한다고 생각하나?
양:그럴 것이라고 믿는다.
쩡:홍콩 언론은 유라시아가 세금을 체불했다고 보도했다.
양:지방 세무부문에서 늦게 납부해도 된다고 분명히 그랬다.며칠 전에 평양에서 돌아온 휴에야 세금을 납부하라는 통지를 받았다.10월12일에 완납하겠다고 이미 말해 놓았다.
쩡:당신 개인에 대한 조치인가 아니면 랴오닝성 기업가 전체를 대상으로 했나?
양:나 개인이다.
쩡:유라시아농업의 주식이 큰 파동을 겪고 있다.당신이 신의주 특구로 가면 유라시아농업과 선양 네덜란드촌은 어떻게 처리하나?
양:네덜란드촌의 부동산은 위탁관리를 하고 유라시아농업은 이미 CEO를 신규 임명했다.내가 몇 년 동안 쏟아 부은 심혈이기때문에 잘 처리하겠다.
쩡즈모의 양빈에 대한 인터뷰는 여기서 끝났다.내일이면 그녀는 취재팀과 함께 양빈을 따라 신의주까지 가서 계속 추적보도를 하기로 돼 있었다.실내를 대낮처럼 비추던 봉황위성TV의 조명등이 점차 어두워졌다.
양빈이 몸을 일으키며 한 마디 했다.
“포브스에 오른 게 정말 후회된단 말이야… …”
쩡즈모는 의아한 눈길로 양빈을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쩡즈모와 함께 온 촬영기자가 특구 장관과 신의주의 배경자료를 촬영하겠다며 자료를 요구하자 양빈은 옆에 서 있던 사람에게 북한에서 새로 만든 신의주 특구 지도와 특구 장관 임명장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양빈이 이윽고 인터뷰를 할 떄 억눌린 기분을 털어 버리려는 듯 아까보다 훨씬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즈모씨,오늘 저녁식사는 내가 직접 요리를 하겠으니 여기서 하지.”
말을 하며 양빈은 어느새 주방으로 갔다.
오늘 밤,쩡즈모의 물음에 대한 양빈의 대답이 아주 간단하다는 것을 발견했다.목소리도 압박감을 느껴졌다.이는 절대 양빈의 성격이 아니었다.누군가 밖에 경찰차량과 경찰이 자꾸 늘어난다는 말을 해서 그런 것일까?모두들 이상한 분위기에 싸여 채 묵묵히 있는데 리강이 입을 열었다.
“양총재님,내일 압록강을 건너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솔직한 말이었다.유라시아그룹의 홍보실 주임인 저유샹도 말했다.
“그럴 것 같습니다.”
양빈도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있음이 분명했다.큰 접견실에 있던 양빈의 친척과 친구들 모두가 불길한 예감이 스치고 있음을 느꼈다.
“왜 저렇게 많은 경찰과 경찰차량이 동원되지요?”
쩡즈모는 알 수 없다는 듯한 물음은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는 쩡즈모가 큰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이 ‘고향사람’에게 말을 걸었다.나는 그녀에게 양란(楊蘭)을 포함해 국내의 많은 텔레비전방송국 프로듀서들이 책을 써내는데 독자들의 환영을 받는다고 말했다.
“즈모씨도 봉황위성TV에서 그 동안 인터뷰한 자료를 정리하면 될텐데.”
내가 그녀에게 건의했다.
“아직 그 양이 부족합니다.1,2년이 더 지나야 되겠죠.”
“조선에서의 견문을 국내에서 출판하게 되면 그 기획과 출판을 저에게 맡기세요.”
그녀가 겸손하게 대답했지만 나는 계속 견지했다.그녀는 미소를 띨 뿐 더 말하지 않았다.
사실 내 건의는 진심이었다.그녀의 문장실력이 좋다는 사실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유감스럼게도 그녀의 글을 읽은 적이 없다.그녀는 홍콩 봉황위성TV 재경프로를 책임지고 재계의 큰 인물을 많이 인터뷰했고 또 이번에 북한까지 갔다 왔으니 국내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줄 만한 것이 있겠다는 내 나름대로의 판단에서 그런 건의를 했다.
그러고 있는데 쩡즈모의 휴대폰이 울렸다.홍콩 봉황위성TV에서 걸려온 전화였다.그녀는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를 피해 화장실에 들어가 전화를 받았다.그날 밤 봉황위성TV 프로듀서와 쩡즈모의 대화가 뉴스로 방송됐다.양빈이 10월4일 오전 6시 30분 선양을 출발,9시경에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에 도착한다는 내용이었다.
양빈이 경찰에 연행된 과정
양빈은 말대로 직접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서 요리를 볶았다.파란빛의 가스불이 활활 타오르고 가마 안의 식용유가 달아오르면서 내는 찌르륵 찌르륵 소리,그리고 프라이팬과 국자가 부딪치는 쇳소리,양빈의 익숙한 손놀림이 방안에 있던 사람들을 하나둘씩 주방에 모여들게 했다.봉황위성TV의 촬영기자가 나와 양빈이 요리하는 모습을 렌즈에 담았다.
네덜란드에서 유학을 할 떄 양빈은 중국음식점에서 일한 적이 있다.그때 배워둔 밑천이 있어 양빈의 요리솜씨는 좋았다.드디어 다 만들어진 요리가 식탁에 올랐다.과연 그 색깔과 냄새,맛이 일품요리사 못지 않았다.그래서 사람들은 또 한바탕 양빈의 요리솜씨가 좋다고 떠들어댔다.
토마토와 고기완자를 넣어 만든 국은 토마토의 색깔이 빨갛게 잘 우러났고 거기에 흰색의 완자와 새파란 파 잎이 떠있어 보기만 해도 군침이 스르르 돌았다.모두들 식탁을 빙 둘러싸고 앉았다.양빈도 그 속에 끼어 젓가락을 든 채 웃고 떠드는 사람들을 바라만 보았다.이것저것 맛보라며 쩡즈모에게 자꾸 요리를 집어주었다. ‘베이징 여자’는 아무 격식 없이 식사를 하는 우리와 달리 꽤 얌전하게 음식을 집어먹었다.
선양 네덜란드촌에서 필자와 양다융 변호사
당시 ‘마지막 식사’를 하느라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로는 나와 양빈,쩡즈모 그리고 봉화위성TV의 2명의 기자 그리고 왕뤄와 왕후이둥이었다.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쩡즈모와 그 일행이 자리를 떴고 우리 몇사람은 큰 접견실에 나왔다.그곳에는 이미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양빈의 사관학교 동창 천흥(陳弘)과 리강(李剛,양빈의 초등학교 시절 선생의 남편),루반(陸班),쉬닝(徐寧,갓 부임한 경호원),저우샹,북한의 정부관리 한명철,양빈의 비서 류뎬후이,왕뤄 그리고 그와 함꼐 온 두 명의 항구 전문가,양빈의 고모등이었다.
밤 10시 40분,나는 하루의 피곤이 몰려왔다.나이가 많아서 힘들었다.그래서 양다융을 데리고 A9별장을 나와 내가 머무는 별장에 휴식하러 갔다.양다융과 나는 한 별장에 머물렀다.
길에서 우리는 양빈의 A9별장과 불과 4,5m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경찰차량 1대와 승용차 1대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것은 선양 공안당국의 차량이었다.굽이를 도는데 그곳에도 두 대의 특경 경찰차량이 서 있었고 차 안에는 경찰이 앉아 있었다.그러나 그들은 우리를 멈춰 세우지는 않았다.우리가 탄 차가 체육관을 지나는데 그 곳에도 특경 경찰차량이 서 있었고 헤드라이트는 환히 켜저 있었다.이들 경찰차량이 서있는 위치로 보아 A9별장을 포위한 것 같았다.차량 사이 거리도 매우 가까웠다.
“관선생님,이렇게 많은 경찰차량이 양빈의 방을 포위하고 있는데 도대체 원일일까요?”
“모르겠어.”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별장에 들어간 후 각자 자기 방에 들어가 잠자리에 들었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다급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양빈의 별장에서 걸어온 전화였다.한 친구가 휴대폰으로 내 방에 전화를 건 것이었다.
“관선생님,양총재님의 별장이 경찰에 포위됐습니다.경찰들이 대문 입구에 몰려 있어요.창문 앞에도 있고 누구도 별장 밖에 못나가요.이 역사적인 순간을 관선생님이 직접 현장에서 지켜봐야 할 것 같아 전화를 했습니다.앞으로 책을 써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듣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
침대 옆에 놓아둔 작은 시계를 보았다.새벽 1시30분이었다.
“금방 갈게요.”
나의 대답과 함께 상대편의 휴대폰이 꺼졌다.
부랴부랴 옷을 주어입고 옆방에서 자고 있는 양다융을 깨웠다.
“빨리 서둘러요.양총재 별장이 경찰에 포위됐어요.누구도 출입이 금지됐답니다.”
아직 한창 젊은 나이인 변호사 양다융이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어찌된 일입니까?무슨 일이 생긴 것입니까?”
나는 A9별장에서 걸오온 전화내용을 대충 얘기해주었다.
양다융 역시 급히 옷을 주어입고 나와 함께 밖으로 내달았다.
어두운 밤,차가운 밤 공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우리 두 사람은 말없이 인공으로 만든 작은 강을 따라 발걸음을 다그쳤다.테니스장 부근까지 왔을 떄 앞에 두 대의 경찰차량이 보였다.헤드라이트가 환하게 켜져 있었고 경찰이 그 곁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도로입구에도 경찰차량이 헤드라이트를 켠 채 서 있었다.큰길로 가기 어려울 것 같았다.그래서 몇 개의 별장을 에돌아 테니스장 뒤쪽으로 왔다.그러나 양빈의 A9별장은 사방이 전부 경찰차량이 배치돼 있었고 크고 작은 헤드라이트가 전부 켜져 있었다.그 불빛에 경찰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자,돌아갑시다.”
나는 양다융에게 말했다.
“어찌된 일입니까?”
양다융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듯했다.
“지나갈 수 없어요.”
내가 대답했다.
양다융도 많은 경찰차량이 헤드라이트를 켜고 있는 것을 보았다.A9별장 일대는 대낮처럼 밝았다.경찰들의 그림자만 움직일뿐이었다.양다융이 걸음을 멈추었다.
“돌아갑시다.”
나는 양다융을 이끌고 오던 길로 돌아섰다.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양다융이 우리가 머무는 별장으로 돌아오며 내게 말했다.
뭐라고 할만한 대답이 없었다.
“가서 잠을 자 ,일이 있으면 자네를 부르겠어.”
양다융은 자기 방에 들어가 다시 잠자리에 누웠고 나는 담배를 붙혀 물며 객실이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켰다.
새벽 3시쯤,나는 양다융을 꺠우지 않고 혼자 밖에 나왔다.아까 양빈의 별장으로 가던 길을 따라 다시 걸었다.그때까지 경찰차량과 경찰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경찰차량의 헤드라이트가 전부 켜저 있었고 좀 전에 보았을 떄보다 더환했다.
다시 발길을 돌렸다.별자으이 위층 내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얼마나 잤을까.다급한 전화벨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다짜고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양빈의 사관학교 동창생 왕자탕(王家堂)이었다.
“관선생님이세요?”
“네.”
“나는 왕자탕입니다.양빈은 5시 10분에 선양경찰국에 연행되었습니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지금 시각은 10월4일 6시10분이었다.
내가 물었다.
“누구랑 연행됐나요?”
왕자탕이 대답했다.
“양빈 뿐입니다.”
내가 다시 물었다.
“경찰이 아직도 그곳에 있나요?”
왕자탕이 대답했다.
“경찰과 경찰차량은 다 가고 없어요.”
내가 또 물었다.
“그 곳에 지금 누구랑 함께 있어요?”
왕자탕이 말했다.
“리강과 천훙,양빈의 고모 그리고 제가 있습니다.리강이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라고 해서 지금 제가 전화를 거는 것입니다.빨리 오세요!”
“알았어요.곧 갈게요.”
수화기를 놓고 잠깐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다가 다른 별정에 머물고 있는 마닝과 차오성리를 불러 함께 가기로 했다.
그리고 저쪽 방에서 잠자고 있는 양다융을 깨웠다.양빈이 새벽5시10분경 경찰에 연행됐다는 사실과 경찰차량이 지금은 없어졌다는 것까지 알려주었다.
“다른 사람은 연행되지 않았나요?”
양다융이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양빈 뿐입니다.”
우리 두 사람은 별장을 나섰다.날은 이미 훤하게 밝아 있었다.문 앞의 작은 강에 흰 두루미와 검은 두루미가 한가히 서있었다.모든 것이 그렇게 조용했다.어제 밤 이곳에서 어떤 일이 발생했다는 흔적조차 없이 모든 것이 그렇게 조용하다 못해 아늑하기까지 했다.
6시30분 ,우리는 양빈의 별장에 도착했다.그 곳에서 보초를 서던 2명의 경호원도,두 마리 사냥개도 보이지 않았다.주인없는 별장은 텅빈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큰 접견실에서 리강과 왕자탕,천훙,양빈의 고모 이렇게 몇 사람만 남아 있었다.양빈이 연행되기까지 이곳에서 지켜봤던 사람들이었다.천훙의 말을 듣고서야 어제밤 이 곳에서 일어난 사연의 자초지종을 대체적으로 알 수 있었다.
“어제 밤 11시경,한국에서 두 번쨰로 큰 은행인 우리은행 이종휘(李鍾輝) 부행장과 황규승(黃圭勝)차장,정준문(鄭俊文)과장 등 일행이 벤츠 승용차 두 대를 타고 양빈의 별장에 왔어요.모두 8명이었는데 한국인이 6명이고 중국인이 2명이었습니다.중국인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마르게 생겼고 한 사람은 뚱뚱했어요.그들은 신의주 투자에 관해 논의하려고 양빈을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네덜란드촌 양빈 객실에서의 선양 평상그룹 이사장 쑨펑상과 양빈,2시간 후 양빈은 선양 경찰에 연행됐다.
두 명의 중국인은 누구인가?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마른 사람은 선양 펑샹(鳳祥)그룹의 쑨펑샹(孫鳳祥) 회장이었고,뚱뚱한 사람은 쉬웨이(許偉)였다.나는 쑨펑샹선생을 알고 있었다.그의 회사를 참관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는 선양의 유명한 민영기업가로 주로 부동산업을 경영하고 있었다.한국 기업가들과 합작 경험이 많았고 또 교제가 깊은 한국친구들도 많았다.양빈과의 자리도 쑨펑샹이 마련한 것이었다.
천훙이 소개하며 말했다.
“양빈은 큰 접견실에서 한국손님들을 만났어요.11시 반쯤 되었을 때 나와 리강이 돌아가 자려고 문을 열었는데 문을 열자마자 경찰이 막고 나섰습니다.나갈 수도 없었어요.양빈이 손님들과 상담하고 있는데 방해할 수도 없고 해서 고모와 왕후이둥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왕후이둥은 양빈을 옆의 작은 주방에 불러 경찰이 전면 봉쇄하고 있으니 아무도 별장을 나갈 수 없는데 한국 손님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그들을 먼저 보내야 하지 않을까 물었습니다.양빈은 좀 더 기다려보자며 큰 접견실에 가서 상담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는 중에 밤 12시 30분이 되었어요.모두들 조급했습니다.한국 손님을 안내한 중국인 뚱보가 공안국장과 잘 아는 사이라며 밖에 나가 사람을 찾아보겠다고 자진해 나섰어요.그러나 문을 열자마자 경찰이 막았어요.그가 쪽지를 써서 밖의 경찰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으나 그 자리에서 퇴짜를 맞았어요”
“모두들 의논 끝에 한국 은행대표들에게 이미 공안이 봉쇄하고 출입을 금지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로 했습니다.한국의 은행가들은 휴대폰으로 한국 영사관에 전화를 걸어 그들이 이 곳에 묶여 있는 상황을 얘기했어요.1시30분,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습니다.고급 경찰관과 랴오닝성 외사처 처장,선양시 외사차 처장 등이 들어섰어요.그들이 한국인이 누구냐고 묻자 한국인 6명이 일어섰어요.한국인을 안내해온 중국인 2명까지 합쳐 8명은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후에 쑨펑샹 선생은 내게 한국 우리은행의 사람들이 양빈을 찾아오게 된 경위에 관해 이렇게 소개했다.
“나와 한국의 SR개발그룹은 선양에서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합작하고 있어요.잘 아는 친구지요.SR그룹과 우리은행은 또 은행과 기업 사이의 합작관계였습니다.우리은행은 한국의 두 번째로 큰 은행인데 100여 개의 대기업과 합작관계를 맺고 있어요.
양빈이 신의주 특구 장관으로 임명된 후 한국의 많은 기업들이 신의주 투자 때문에 우리은행을 찾아왔답니다.우리은행은 또 SR그룹을 통해 저를 찾게 된 것이지요.”
“한국 은행가들은 10월3일 베이징에 도착했습니다.베이징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선양에 왔을 떄는 이미 밤 10시30분이었어요.우리는 차를 몰고 직접 네덜란드촌으로 향했어요.밤 11시가 좀 지나 양빈의 별장에 도착했습니다.사실 나는 네덜란드촌이 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한국 기업인들과 이미 며칠 전부터 약정된 상담이라 그 시간을 지연할 수도 변경할 수도 없어 계획대로 실행했습니다.우리를 태운 3대의 승용차가 네덜란드촌에 들어서자 3개의 초소와 1개의 이동초소를 거쳐서야 겨우 양빈의 별장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차에서 내리자 또 수십 명의 경찰이 뛰어오는 것이었습니다.우리은행의 이종휘부행장이 오해할까봐 ‘중국 정부가 양빈 특구 장관을 보호하기 위해서 경찰을 배치한 것’이라고 해석했지요.”
“양빈은 별장 문 앞에서 우리은행 대표들을 마중했어요.머리를 돌려보니 경찰은 이미 별장 주위를 물샐틈없이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양빈에게 한국의 SR그룹,우리은행 손님들을 소개했어요.우리은행 이종휘 부행장,황규승 차장,정준문 과장 그리고 나와 쉬웨이,통역 안경호 등이 자리를 장하고 앉아 상담이 시작되었습니다.”
“북한은 한국인의 신의주 특구에 직접 투자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의 100여 개 기업들은 우리은행에 위탁해 양빈과상담을 요구한 것이었습니다.양빈은 우리은행 대표들에게 신의주 지도,건설 기획과 관련자료를 보여주며 항공,공항과 화공공장의 대체적인 위치를 알려주었어요.
한국 기업가와 은행대표들은 제1기 투자로 신의주 특구에 100억 위안을 투자하느네 동의했어요.그중 20억 위안은 선양 네덜란드촌의 마무리 공사와 발전자금으로 하고,나머지는 신의주 특구의 공항 부두 석유화학공장 등을 건설하는 데 투자하기로 했습니다.이를 위해 우리은행이 100여 개 한국기업을 대표해 펑샹그룹과 합작 투자회사를 설립하고 이 투자회사의 명의로 다시 양빈과 합작하면 이 100억 위안의 인민페가 신의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12시가 넘어서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누군가 문을 여는 것 같더니 경찰이 공무집행이라며 별장출입을 금지한다는 것이였습니다.나는 하는 수없이 이종휘 부행장에게 네덜란드촌 토지개발에 문제가 있어서 경찰이 공무집행 중이니 잠시 밖을 나갈 수 없다고 양해를 구했어요.그래서 모두들 다시 자리에 앉았어요.차를 마시며 한담을 하다가 양빈은 어쩔 수 없다며 먼저 인사를 하고 2층에 휴식하러 올라갔어요.
새벽2시쯤,계속 어떻게 앉아있을 수가 없다는 생각에 휴대폰으로 선양시 정부 관리에게 보고를 했던니 협력하겠으니 계속 기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새벽3시쯤,랴요닝성과 선양시 공안 의사처 책임자들이 왔어요.상황을 묻고 한국손님과 그들을 안내해온 우리를 밖에 내보냈습니다.네덜란드촌을 떠나 한국 손님들을 만호(万豪)호텔까지 데려다주고 나니 그때 벌써 새벽 4시가 되었습니다.”
천홍이 나에게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동안 리강이 한마디 덧붙였다.
“당시 내가 집계를 해밨는데 한국 손님들이 떠나고 양총재 별장에는 모두 17명이 남아있었어요.”
천홍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들이 또 물었어요. ‘북한 외교관은 누구 입니까?’한선생이 ‘접니다’고 대답했습니다.경찰은 ‘당신은 가도 좋습니다’ 한선생은 ‘저는 여기 남아있겠습니다.’고 대답했어요. 경찰과 외사처 처장들이 모두 떠났어요.그떄는 2시가 넘었어요.모두들 시장기가 느께졌조.양빈이 경호원에게 계간 볶음과 요리 몇가지를 시켰습니다.모두들 조금씩 요리를 하고서야 각자 흩어져 잠자리에 들었습니다.1층은 유라시아회사 직원들이었고 양비과 운전기사 경호원은 2층,왕뤄와 나머지 사람들은 3층에 잠자리를 잡았어요.”
“새벽 4시경,랴오닝성 외사처 처장이 들어서더니 류비서를 불러내갔고 4시30분에는 기사 선량을 불러서 한참을 얘기했어요.4시50분경,문이 열리고 30여명의 경찰이 들어서더니 3줄로 열을 지어서는 것이였어요.그 뒤로 랴오닝성과 선양시 관리들이 들어섰고 무장경찰이 또 그 뒤에 섰습니다.랴오닝성 정부의 간부인듯한 사람이 ‘소환심문영장’을 꺼내 보이면서 1층에 있는 저우상,양빈의 고모,왕후이둥,리강 등 우리 및 사람을 아래층에 있는 류비서 사무실에 들어가라고 하더니 2층으로 올라갔어요.저도 그들의 뒤를 바짝 쫓아 2층에 올라갔어요.2층에 올라간 그들은 양빈을 깨워 옷을 입으라 하고는 ‘소환심문영장’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경찰은 그때서야 제가 랴오닝성이나 선양시 공안 외사처 인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저를 아래층에 내려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전홍은 여기까지 말하고 스스로도 멋쩍은지 씩 웃었다.경찰 수행인원으로 위장했다가 발각되어 아래층에 쫓긴 것이 스스로도 장난이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양빈의 고모 양펑린은 양빈이 경찰에 연행될 때 자기가 보았던 장면을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양빈이 경찰을 따라 나가는 것을 보고 급히 창문앞에 뛰여갔어요.커텐을 젖히고 밖을 내다보니 양빈은 벌써 대문을 나서고 있었어요.수십 명의 무장경찰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계단을 내려서면서 이쪽을 힐끗 뒤돌아보더니 경찰과 함께 경찰차량에 올랐어요.수갑은 차지 않았어요.”
리강이 보충해 말했다.
“양빈이 떠난 지 몇분이 안되어 선양시 공안국 사람들이 한선생을 불러내 밖에서 얘기를 하더군요.아마 상황을 설명하는 것 같았어요.모두들 하나 둘 병장을 떠났습니다.이때 경찰과 경찰차량은 모두 떠나고 업었어요.한선생과 얘기를 하던 선양시 공안국 사람은 우리가 나가는 것을 보면서 막지 않았어요.”
나는 어제 밤 왕뤄와 그가 데리고 온 항구 전문가 두 사람이 생각나서 주위 사람들을 보고 ‘왕뤄는 어디 있어요?’하고 물었다.
“어제 밤 3층에 있었던 것 같은데요.”
리강이 대답했다.
나는 급히 3층에 뛰어올라갔다.아니나다를까 왕뤄는 3층에 있었다.새벽3시가 되어서야 잠이 든 그는 양빈이 새벽5시에 연행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나는 새벽에 일어난 일을 대층 설명해주고 왕뤄에게 항구 전문가 두 사람을 데리고 원래 거처했던 별장에 옮겨 자라고 했다.
이때 왕후이둥이 급히 왔다.원래 새벽6시30분에서 7시까지 내외신 기자들이 이곳에 집합해 출발하기로 했던 것이다.왕후이둥이 대변인의 직무를 맡고 있어 내외신 기자 접대를 책임지고 있었다. ‘뉴욕 타임스’의 판원신이 왔다.그는 양빈이 이미 선양 경찰에 연행된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는 왕후이둥에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며 다그쳐 물었다.판원신뿐 아니었다.있다라 도착하는 내외신 기자들에게 사연을 설명하느라 왕후이둥 한참동안 진땀을 뺐다.
이때 나는 유라시아그룹에 온지 이틀밖에 안된 루반과 쉬닝(경호원)이 가방을 들고 황황한 표정으로 양빈의 별장을 떠나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아무에게도 간다는 인사를 하지 않았고 또 아무도 그들을 막는 사람이 없었다.그들은 그렇게 떠나버렸다.
나는 저 앞에 쩡즈모가 서 있는것을 보았다.쩡즈모는 강가에서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양빈의 별장 쪽을 바라보고 있어다.
2002년10월4일새벽5시,양빈이 경찰에 연행되어 가는 장면의 목격자 천홍(왼쪽)과 리강이 필자에게 당시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장면
어제 밤까지 인터뷰하고 밥을 먹고 한담을 하던 그 별장,등불 찬란했던 별장이 지금은 주인없는 빈곳이 되어 있는것이다.그런 별장을 쩡즈모는 그렇게 조용히 서서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이른 아침의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날려도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그 곳에 선 채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이 여자가 과연 그 “경쾌하고 자신감 넘치는 발걸음,유명브랜드의 옷과 굽 높은 구두,하나로 묶어진 검은 머리칼,한손에 파일 다른국여자”(인터넷의 ‘특별한 여자’에서 발췌)란 말인가?
쩡즈모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베이징의 아침은 즐겁고 호기심과 동경으로 차있다.
뉴욕의 아침은 찬란하고 열광적이며 정열적이다.
홍콩의 아침은 환상적이고 차분하며 자신감 넘친다.”
미국 【시대】주간지 기자 디수전이 필자를 취재할 때의 사진
지금 이 순간 쩡즈모는 조용히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선양네덜란드촌의 이 아침을 무엇으로 그려낼까?
쩡즈모는 그후 자기의 <<흑적-----살아있는 생명과 기억중>>그날 아침에 대해 아래과 같이 표현하였다.“양빈이 체포당하는 그날,나는 동료와 함께 다시 네덜란드촌에 도착하였다. 커다란 네들란드촌이지만 지금은 사람그림자도 없었다. 경찰도 없고 유라시아 인원도 없었다.큰거리에 한사람도 없었다, 오직 큰 풍차만 고독히 바람에 따라 돌아가고 있었다.
나의 머리속에는 갑자기 한폭의 그림이 나타났다. 양빈은 도박장에서 통크게 돈을 뿌리는 기백이 대단하였다………..기실은 ,양빈의 인생도 도박이 아닌가? 네덜란드에서 폴란드,심양에서 조선까지. 도박이라면 필히 승리과 실패가 있다. 이 도리는 양빈이 누구보다 더 정확이 알고 있을거다.”
북방의 가을 아침은 차갑다.높은 하늘과 맑은 구름,태양이 솟아올랐지만 아침바람은 여전히 추위를 느끼게 했다.
네덜란드촌에 멋있게 만들어진 유럽풍의 건축과 풍차 그리고 유리온실을 지켜보고 있을 마음조차 없어 나는 양빈의 별장 큰 접견실에 다시 들어와 소파에 앉아 담배연기만 뿜어 올렸다.
왜 이 지경이 됐을까?머리 속에는 지난 일들이 떠올랐다.온갖 사람과 사건들이 질서없이 떠올랐다.그 속에는 문제의 원인과 해답을 찾아보려고 애썼다.
그날오전6시,한국텔레비전방송국이 ‘신의주 특구 장관 양빈, 중국 선양 경찰에 연행이라는 뉴스를 보도하자 세계 각지의 텔레비전방송국과 인터넷사이트,신문 등에서 이 사건을 보도했다.아마 중국주재 한국 영사관에서 한국기자들에게 알렸을 것이다.
8시,우리는 함께 아침식사를 하였다.좌석에는 유라시아회사 리강、 스쥔、조선외교관 한명철(이것은 우리 몇달만에 함께 단독으로 식사) 、마닝、 왕후이동、양다융과 나. 식석에서 한선생은 ”양총재 경찰에 의해 연행된후 (5시15분)6시에 김장군님이 알게 되였습니다.김사장도 신의주에서 알게 되였고 이것은 양총재 개인에 대해 온것이 아니고 우리에 대해 온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그리고는 우려한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면서 말을 끊었다.
“양빈이 대중의 시야에 출현하는 그때부터 양빈은 알수가 없는 비밀이 되였다.양빈의 첫번째 사업자금부터, 특구장관까지 알수가없는 비밀이 되였다.양빈은 신화이다. 고아로부터 부자가 되는 신화. 가난한 류학생부터 특구장관의 신화……비밀이 무엇인가가 중요한것이 아니라 중요한것은 필경 누구가 이렇게 없는 신화를 만들어 냈는지?양빈인가?우리인가?아니면 우리가 함께 생활하는 혼랍하고 복잡한 그 변혁년대인가?” 쩡자모은 이렇게 말하였다.
10시,양빈의 큰 고모 양펑취와 넷째 고모 양펑린 두 사람이 양빈을 만나러 선양시 공안국에 갔다.경찰은 양빈은 법에 따라 ‘구속’중이어서 아무도 만날수 었다고 했다.그러나 가족 친척이 옷이나 생활용품을 가져오는 것은 가능하다고 해서 그들은 양빈이 평소 입던 속옷과 스리파이브 담배만 남기고 돌아왔다.